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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2025년을 보내며》 3부. 타오르지 않는 문화 — 버티는 감정의 형식들

 

1. 응원봉으로 시작된 해

  촛불 이후의 집단 감정은 왜 불이 아닌 빛을 선택했는가?

  2025년은 응원봉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의 교체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집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바뀌었음을 알리는 징후였다. 광장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였고, 참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손에 쥔 것은 더 이상 촛불이 아니었다. 불꽃 대신 빛이 선택되었고, 타오름 대신 흔들림이 등장했다. 이 변화는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라 희생을 전제로 한 감정 윤리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촛불은 언제나 타오르며 밝아지는 도구였다. 그것은 자신을 소모하는 방식으로 공동체를 밝히는 상징이었고, 한국 현대사에서 정당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촛불이 반복될수록, 그 상징은 미덕을 넘어 의무에 가까워졌다. 희생은 숭고함으로 기억되었지만, 그 감정적 비용은 다음 세대에게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 전가되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서사 속에서, 희생은 존중받기보다 요구되는 것이 되었다.

2025년의 젊은 세대는 이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역사를 감정의 빚으로 상환하고 싶어 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민주화의 성과를 알고 있고, 그 대가가 컸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대가를 같은 방식으로 치를 수는 없다고 느낀다. 응원봉은 이 거리감의 표현이다. 응원봉은 밝지만 타지 않고, 오래 들고 있어도 자신을 소모하지 않는다. 이는 참여를 거부하는 태도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참여를 선택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선택은 책임 회피가 아니다. 오히려 책임의 방식에 대한 재정의다. 응원봉을 든 사람들은 여전히 함께 있고, 여전히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다만 자신을 제물로 삼지 않는다. 타오르지 않겠다는 결정은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싸움의 조건을 바꾸겠다는 의지에 가깝다. 장기간 축적된 경제적 불안과 정서적 피로 속에서, 더 이상 자기 소모를 전제로 한 연대는 설득력을 잃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공동체를 해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대는 사라지지 않았고, 형식만 달라졌다. 뜨거움 대신 지속성이 선택되었고, 절규 대신 신호가 남았다. 응원봉은 저항의 약화가 아니라, 연대의 온도 조절이다. 그리고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2025년을 관통하는 문화적·정서적 판단이었다.

이 판단 위에서 이후의 모든 변화가 이어진다. 영화에서 정의가 설득되지 않고, 드라마에서 서사가 버티는 방향으로 이동하며, 음악에서 분노가 발화되지 않는 이유는 모두 같다. 타오르지 않겠다는 결정, 그러나 함께 있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론. 이 두 문장이 동시에 성립하는 지점에서, 2025년은 시작되었다.

 

2. 영화, 설득되지 않는 정의

왜 2025년의 관객은 극장을 떠났는가?

  2025년의 영화 산업 위기는 단순한 불황이 아니었다. 관객 수 감소와 한국 영화의 흥행 부진은 결과일 뿐, 원인은 따로 있었다. 영화가 더 이상 관객의 윤리 감각을 설득하는 매체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극장은 여전히 정의를 말했지만, 관객은 그 정의에 감정적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이 이탈은 취향의 변화가 아니라, 서사가 요구한 감정 비용에 대한 거부였다.

이 변화는 같은 시기 극장가에서 의외의 흥행을 기록한 **귀멸의 칼날**을 통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상계엄 사태의 여파로 극장 자체가 위축된 상황에서도 이 작품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이는 팬덤 효과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흥행은 관객이 어떤 종류의 정의에는 여전히 반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핵심은 이 작품이 정의를 요구하지 않고 설명했다는 점이다.

〈귀멸의 칼날〉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명확하다. 그러나 악은 단순한 제거 대상이 아니다. 각 적대 인물은 왜 악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서사를 부여받는다. 악은 본성이 아니라 조건의 결과로 제시된다. 관객은 이 악을 용서하지는 않지만, 이해하게 된다. 이 서사는 관객에게 분노를 끝까지 유지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분노 이전의 감정, 즉 연민과 거리 두기를 허용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영화의 전통적 정의 서사와 차이가 발생한다. 한국 영화는 오랫동안 관객을 도덕적 공범의 위치에 세워 왔다. “이 분노에 동의하는가”, “이 응징을 끝까지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이 암묵적으로 따라붙는다. 이는 강력한 서사 장치였지만, 2025년의 관객에게는 과도한 요구가 되었다. 이미 현실에서 충분히 분노를 소모한 관객에게, 영화가 다시 분노를 호출했을 때 그 감정은 지속되지 않았다.

2025년의 관객은 정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다만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 다시 불타오르기를 요구받는 구조를 거부했을 뿐이다. 이해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정의는 받아들였지만, 분노를 끝까지 짊어져야 하는 정의는 선택하지 않았다. 이 선택은 윤리적 후퇴가 아니라, 윤리를 다루는 방식의 전환이다.

이 어긋남이 바로 극장 붕괴의 핵심이다. 영화는 여전히 불꽃을 요구했지만, 관객은 이미 응원봉을 들고 있었다. 타오르지 않겠다는 결정, 그러나 옳고 그름에 무관심해지지 않겠다는 태도. 영화는 이 변화를 가장 늦게 감지한 매체였다.

 

3.드라마와 OTT, 망하지 않기 위해 선택된 이야기

성공보다 ‘무사’를 다루는 서사들

2025년의 드라마와 OTT 흥행작들은 공통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꾸지 않고, 정의를 완성하지 않으며, 인물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대신 아주 현실적인 질문 하나에 집착한다. 오늘은 어떻게 넘길 것인가. 이 질문은 작아 보이지만, 지금의 시대에는 가장 큰 질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은 커지지 않는다. 대신 오래 간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있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큰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남는 것은 감각이다.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압박,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공허함, 말로 꺼내지 못한 후회들이 조용히 쌓인다. 인물들은 울부짖지 않는다. 다만 조금 지쳐 있다. 이 드라마의 미덕은 바로 거기 있다. 시청자는 감정을 쏟아붓지 않아도 된다. 분노하거나 감동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같은 속도로 하루를 같이 보낼 수 있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사는 대기업 김부장 이야기**는 이 감각을 훨씬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제목부터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서울 자가, 대기업. 겉으로 보면 끝난 인생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끝난 줄 알았던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주인공의 하루는 늘 조심스럽다. 회사에서는 말 한마디를 아끼고, 집에서는 불안을 숨긴다. 이 드라마에는 폭발이 없다. 대신 매일 반복되는 미세한 긴장이 있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성공의 기쁨이 아니라,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시청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판단하라고 하지 않고, 편을 들라고도 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정도로 살고 있는 사람이 당신만은 아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들은 중간에 멈춰도 된다. 한 편을 보고 잠들어도 되고, 며칠 뒤 다시 돌아와도 괜찮다. 이야기는 시청자의 삶을 점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틈에 끼어든다.

  중요한 건 이 지점이다. 2025년의 드라마와 OTT는 더 이상 변화의 서사를 팔지 않는다. 대신 파국을 피하는 법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오늘을 망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이 태도는 시청자의 태도와 정확히 겹친다. 대중은 더 이상 불꽃을 원하지 않는다. 꺼지지 않는 불씨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은 오래 남는다. 강렬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지워지지 않고, 조용하기 때문에 반복해서 볼 수 있다. 영화가 여전히 관객에게 결단을 요구하던 사이, 드라마와 OTT는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은 무사히 지나가자.” 그리고 2025년의 시청자들은, 그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4. 음악, 분노 대신 재생되는 감정들

  2025년의 히트곡들은 왜 싸우지 않았는가

  2025년의 플레이리스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면, 이상할 정도로 목소리가 낮다. 소리를 지르는 노래가 없어서가 아니라, 지르지 않아도 되는 노래들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 해의 히트곡들은 분노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분노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대신 감정을 잘게 나누고, 오래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바꿔 놓는다. 음악은 더 이상 광장에 서지 않는다. 이어폰 안으로 들어온다.

  아이돌 음악에서 이 변화는 가장 분명하다. 2025년에도 여전히 정상에 오른 그룹은 IVE, NewJeans, SEVENTEEN 같은 팀들이었다. 이들의 곡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투쟁이나 저항이 아니다. “나는 나대로 괜찮다”, “지금의 속도로 가도 된다”, “조금 느려도 문제없다”는 식의 감정 정렬이다. 이 노래들은 함께 부르기보다는 반복해서 듣게 만들어진다. 군중을 만들지 않고, 개인의 상태를 안정시키는 음악이다.

 

  트로트의 재등장은 이 흐름을 다른 세대의 언어로 증명한다. 임영웅, **영탁**의 노래에는 분노가 없다. 대신 이미 지나온 고생이 있다. “힘들었다”는 말은 나오지만, “바꿔야 한다”는 외침은 없다. 이 음악은 싸움을 준비시키지 않는다. 대신 지난 시간을 정리해준다. 트로트가 다시 선택된 이유는 명확하다. 이 노래들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감정을 접어서 보관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디 음악은 이 세 흐름 중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집요하다. 실리카겔, 선우정아 같은 뮤지션들의 노래에는 분노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확히는 분노가 너무 작게 분해되어 있다. 피로, 무력감, 애매한 불안, 설명되지 않는 우울로 나뉜다. 이 노래들은 크게 히트하지 않는다. 대신 오래 재생된다. 인디 음악은 2025년의 감정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다. 불타지 않기 때문에 오래 남는 감정이다.

 

  이 세 장르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금 이 감정으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 아이돌은 감정을 정돈하고, 트로트는 감정을 수습하며, 인디는 감정을 해체한다. 이 음악들은 공통적으로 분노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분노는 즉각적인 연대를 만들지만, 빠르게 소진된다. 2025년의 대중은 이미 그 소진을 경험했다. 그래서 노래는 더 조용해졌고, 대신 더 오래 남았다.

  결국 “왜 분노의 노래는 사라졌는가”라는 질문은 이렇게 바꿔야 한다. 왜 분노를 노래의 중심에 둘 필요가 없어졌는가. 대답은 단순하다. 싸움보다 생활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음악은 더 이상 시대를 흔들지 않는다. 대신 하루를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준다. 그리고 2025년의 대중은, 바로 그런 노래들을 선택했다.

 

5. 응원봉 이후의 시대

  타오르지 않겠다는 선택이 남긴 것

  2025년을 관통한 문화의 변화는 하나의 명확한 선택으로 수렴되었다기보다, 여러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된 공통된 태도에 가까웠다. 그것은 더 이상 타오르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촛불이 희생과 인내를 전제로 한 상징이었다면, 응원봉은 참여의 형식을 바꾼 도구였다. 밝히되 태우지 않고, 함께하되 소진되지 않는 방식. 이 변화는 열기의 상실이라기보다,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일상을 담보로 감정을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이 태도는 특정 사건이나 세대의 의식 변화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오히려 생활 조건의 변화에 가깝다.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사회에서, 감정의 과잉은 곧바로 소진으로 이어진다. 긴 선언, 거대한 서사,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약속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감정은 관리의 대상이 되었고, 참여는 지속 가능해야 했다. 응원봉은 이 전환을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낸 상징이었다. 그것은 불을 들었지만, 불꽃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선택은 문화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영화는 여전히 큰 이야기를 제시했지만, 관객의 감정 비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드라마와 OTT는 이야기의 크기를 줄이며 삶의 리듬에 맞추었고, 음악은 분노를 중심에 두지 않는 방향으로 재편되었다. 각각의 변화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공통의 질문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 감정으로 얼마나 오래 살아갈 수 있는가. 2025년의 문화는 이 질문에 대해 대체로 보수적인 답을 내놓았다.

중요한 것은 이 흐름을 무기력이나 회피로 단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2025년의 대중은 침묵하지 않았다. 다만 외치지 않았고, 불태우지 않았으며, 감정을 과잉 동원하지 않았다. 이는 정치적 무관심이라기보다, 감정의 소모를 이미 경험한 이후의 선택에 가깝다. 한 번의 폭발보다 오래 버티는 쪽이 현실적이라는 판단. 이 판단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 전반의 형식과 톤을 바꾸는 힘으로 작용했다.

물론 이 감각이 모두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강한 서사를 원하는 목소리도 존재했고, 불꽃을 갈망하는 감정 역시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2025년의 문화 중심은 분명히 다른 곳으로 이동해 있었다. 성취보다 지속, 선언보다 리듬, 변화보다 무사. 응원봉으로 시작된 이 감각은 그렇게 한 해를 관통했다. 이 글은 2025년의 모든 문화를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이 해를 설명할 때 가장 많은 장면을 설명해주었던 하나의 선택, 타오르지 않겠다는 선택을 기록하려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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