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극을 향한 ‘마지막 빈칸’ 경쟁
20세기 초, 지도의 마지막 빈칸 가운데 하나가 남극이었다.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과 영국의 로버트 스콧은 이 빈칸에 자기 나라 깃발을 꽂기 위해 서로 다른 길을 준비한다.
아문센은 원래 북극을 노리던 탐험가였지만, 북극점 선점 경쟁이 이미 끝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목표를 남극으로 급선회한다.
영국은 스콧의 남극 탐험을 국가적 사업으로 밀어붙이고 있었고, 1905년 독립을 막 이룬 노르웨이는 새로운 국가 상징을 찾고 있었다.
남극점 경쟁은 그래서 순수한 모험담을 넘어서, 막 독립한 작은 나라와 오랜 제국의 체면이 맞부딪힌 상징 경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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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화 속에서 다시 살아난 남극점 레이스
이 극적인 경쟁 이야기는 나중에 여러 편의 작품으로 스크린 위에 다시 소환된다.
1948년 영국 영화 〈Scott of the Antarctic〉는 로버트 스콧을 주인공으로, 눈보라 속 끝까지 남극을 향해 가는 비극적 영웅담으로 그린다.
영국 관객에게 이 이야기는 “패배했지만 고귀하게 싸운 탐험대”의 서사로 오래 기억된다.
1985년 TV 미니시리즈 〈The Last Place on Earth〉는 시선을 조금 다르게 둔다.
이 작품은 스콧과 아문센의 준비와 선택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장비, 식량, 의복, 이동 수단 등에서 두 탐험대의 차이를 집요하게 비교한다.
영국이 만들어낸 ‘스콧 신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철저한 준비와 계획으로 남극점에 먼저 도달한 아문센의 면모를 더 또렷하게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2019년 노르웨이 영화 〈Amundsen〉은 아문센의 일생을 중심으로, 남극뿐 아니라 북서항로·북극 탐험까지 함께 담아낸다.
이 영화 속 아문센은 단순히 “완벽한 탐험 영웅”이 아니라, 성공에 대한 집착과 주변 관계의 실패까지 안고 살아가는, 장점과 결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인물에 가깝다.
같은 역사적 사건이 국가와 시대, 연출자의 시선에 따라 이렇게 다른 톤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은, 남극점 경쟁이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영화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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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11년 12월 14일, 남극점 위에 세워진 노르웨이 국기
다시 1911년의 실제 순간으로 돌아가 보면, 아문센은 그 해 10월 19일, 동료 4명과 개 52마리, 썰매 4대를 이끌고 남극 기지 프람하임을 떠난다.
이들은 스키와 개썰매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하루 20km 안팎의 거리를 꾸준히 이동했고, 돌아오는 길을 위해 눈더미를 쌓아 표식을 촘촘하게 남겼다.
이누이트의 생활 방식에서 배운 방한복과 개 운용법을 철저히 적용한 준비 덕분에, 대원들은 체력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1911년 12월 14일 오후, 다섯 명의 노르웨이 탐험대는 마침내 지리학적 남극점에 도달한다.
그곳에 노르웨이 국기를 세우고, 임시 기지 ‘폴헤임(Polheim)’을 설치해 측량 기록과 기상 관측 결과, 도달 인증 문서를 남긴다.
이들이 기지로 무사히 귀환한 뒤, “세계 최초 남극점 도달”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문센은 노르웨이의 새로운 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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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콧의 비극과 두 나라가 기억하는 방식
스콧의 영국 탐험대는 말과 모터 썰매, 인력 썰매를 섞어 사용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장비 고장과 악천후에 시달린다.
1912년 1월 17일, 스콧 일행이 남극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이미 세워진 노르웨이 국기와 아문센이 남겨둔 텐트, 기록물이었다.
남극점 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그 지점에서, 이들의 귀환길은 더 가혹해진다.
혹한과 폭풍, 연료와 식량 부족, 동상과 탈진이 한꺼번에 덮치면서, 스콧 대원들은 한 명씩 눈 덮인 평원 위에 쓰러진다.
기지까지 20km 남짓을 남겨 두고 스콧과 마지막 동료들이 남긴 일기장은, 영국에서 “슬프지만 고결한 탐험”의 상징이 된다.
노르웨이의 기억 속 남극은 치밀한 준비와 성공의 이야기로 남고, 영국의 기억 속 남극은 비극적 실패와 희생의 이야기로 남는다.
같은 남극점이지만, 서로 다른 국가의 집단 기억 속에서 완전히 다른 색깔의 서사로 자리 잡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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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극, 정복의 무대에서 기후의 경고장으로
1911년 12월 14일은 한 탐험가가 남극점에 처음 도달한 날이지만, 오늘 남극은 더 이상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지금 남극은 얼음이 얼마나 빨리 녹는지, 해수면이 얼마만큼 높아질지, 지구 기후 시스템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실험실에 가깝다.
남극조약 체제 아래에서 여러 나라 연구자들이 드나들며, 얼음 코어를 뚫어 과거의 기후를 읽고, 바닷물과 생태계를 조사한다.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을 향해 경주하던 시대에는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모든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이제 남극은 “우리가 이 얼음을 얼마나 더 지켜낼 수 있는가”, “지구라는 행성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배웠고,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를 묻는 장소가 되었다.
그래서 12월 14일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한 영웅의 승리를 기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경쟁과 정복을 넘어선 시대에 ‘탐험’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조용히 되짚어 보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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