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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2월 9일(1941년), 임시정부 대일 선전 포고 – 진주만에 대한 식민지 조선의 대답


1. 충칭 겨울밤, 진주만 소식을 듣던 사람들

1941년 12월 9일, 중국 충칭의 겨울 공기는 축축한 냉기로 가득 차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리 잡고 있던 건물 안에서는 난로 몇 대가 힘겹게 돌아갔고, 방마다 종이와 잉크, 담배 연기가 뒤섞인 냄새가 떠돌았다.

이틀 전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 뉴스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곧 세계 전쟁의 판도가 뒤집히고 있다는 신호였고, 망명 정부로 버티고 있던 그들에게도 이 소식은 단순한 전쟁 뉴스가 아니었다.
일본의 전쟁이 제국 내부의 일이 아니라, 마침내 세계의 문제로 드러났다는 감각이 충칭의 좁은 방들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밤 김구와 조소앙을 비롯한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작은 회의실에 모여 있었고, 낡은 나무 탁자 위에는 커피 잔과 재떨이, 각국 신문들이 뒤엉켜 놓여 있었다.
한쪽에는 이미 여러 장의 종이가 빽빽한 글씨로 채워져 있었고, 그 종이들은 논평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이 스스로를 전쟁 당사자로 선언하려는 첫 문장이 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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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주만의 포성이 충칭의 좁은 방까지 닿았던 순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것은 1941년 12월 7일이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장은 더 이상 유럽과 중국에만 묶여 있지 않았고, 태평양 전체가 거대한 전쟁터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 변화를 곧바로 읽었고, 개전 이틀 뒤인 12월 9일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를 발표했다.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무부장 명의의 선전 포고는 “3천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일본과 그 동맹국, 이른바 추축국에 맞서 싸우겠다는 선언이 되었다.
이 선언은 한국이 연합국 진영의 일부로 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외교 문서이자, 식민지 조선이 독립된 정치 주체임을 주장하는 시도가 되었다.


이런 선언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이미 1940년에 창설된 한국광복군의 존재가 있었다.
광복군의 병력은 많지 않았고 무기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임시정부는 더 이상 말만 하는 망명 정부가 아니라고 믿었고, 실제로 무장 병력을 거느린 전쟁 주체로 자신을 내세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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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다섯 개 항목에 숨겨진 정치적 문장들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은 다섯 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짧은 문서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식민지 조선이 세계를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이 촘촘하게 숨어 있었다.

첫째 항목에서 임시정부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한다”라고 적었고, 한국인이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한 하나의 전투 단위임을 선언했다.
이 문장은 조선을 일본의 일부나 종속된 식민지로 보는 시선을 부정했고, 전쟁 속에서도 독립된 정치 주체로 인정받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른 항목에서는 1910년 한일 병합조약과 각종 불평등 조약을 거듭 무효라고 선언했고, 한국에서 활동하는 반침략 국가들의 정당한 권익을 존중하겠다고 밝혔다.
이 표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국제법적으로 부정하는 동시에, 연합국에게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싸우는 편”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문장이 되었다.


또한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 만주국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못 박았고, 전쟁이 끝난 뒤 동아시아 질서를 다시 짤 때 한국의 독립을 전제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짧은 분량이었지만 이 문서는 전쟁 중인 국제 사회에 보내는 외교문이자, 조선 민중에게 전하는 독립 선언문이 되었고,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장 역할까지 떠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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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광복군과 연합군, 끝내 현실이 되지 못한 국내 진공 작전

대일 선전 포고 이후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선언이 말로만 끝나지 않도록 여러 전선에 발을 들이려 했다.
광복군은 이미 중국군과 협력해 일부 전선에서 정보 수집과 후방 교란, 선전 활동을 수행했고, 태평양전쟁이 확대되면서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 투입되는 공작대를 파견했다.

전쟁 막바지에 임시정부는 미국 전략정보국 OSS와 협력해 한반도 상륙과 일본군 타격, 국내 봉기를 결합한 국내 진공 작전을 구상했다.
이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해방의 순간에 태극기와 함께 광복군의 군복과 전투 기록이 더 선명하게 남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일본의 예상보다 빠른 항복으로 인해 이 계획은 실행 직전 단계에서 접혀야 했고, 광복군이 직접 조국 땅에서 전투를 펼치는 장면은 끝내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대일 선전 포고와 광복군의 존재는, 한국이 단순히 해방을 선물처럼 받은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근거로 남았다.
임시정부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전쟁의 주체가 되려고 했고, 이 시도는 이후 독립운동사를 설명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장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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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은 손길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임시정부의 선전 포고는 정치적 의미를 계속 가졌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될 때, 이승만 정부는 “우리는 이미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바 있다”라고 주장하며 조약 조인국에 포함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일본과 일부 서구 국가들은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최종 서명국 명단에서 빠졌다.
식민지 시기부터 이어진 임시정부의 법통과 그들이 세계를 향해 던졌던 선전 포고의 의미는 국제 정치의 계산 앞에서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한국 내부에서 이 선전 포고는 “우리는 일본 편에 선 적이 없다”라는 기억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자리 잡았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히는 문장이 남았고, 독립기념관과 각종 기념관 전시에서 이 성명서가 중요 사료로 소개되었다.
충칭의 좁은 방에서 타자기로 찍어낸 문장이, 수십 년 뒤 한 나라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문장으로 바뀌어 돌아온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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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는 나라’라는 기억을 떠올릴 때

오늘 우리는 대한민국을 전쟁 피해국이자 분단국으로 기억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1941년 12월 9일을 떠올리면, 이 나라가 한때 식민지 신분으로 일본과 그 동맹국에 스스로 전쟁을 선포한 적이 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이 함께 떠오른다.

대일 선전 포고는 전쟁의 승패를 바꾼 거대한 군사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라는 말을 세계와 스스로에게 남기려 했던 문장이었다.
진주만 공습 이후 각국이 일본을 향해 포문을 여는 그때, 충칭의 좁은 방에서는 타자기 소리와 함께 한국어와 한자가 섞인 한 줄 한 줄이 찍혀 나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선전 포고 같은 극단적인 언어를 쉽게 입에 올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외교와 안보, 전쟁과 평화를 이야기할 때 이 나라가 한때 침략국 일본을 향해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한 경험을 가진 나라였다는 사실을 함께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기억은 “우리는 늘 약자였고 늘 당하기만 했다”라는 단순한 피해 서사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고, 식민지와 망명이라는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 주체가 되려 했는지 다시 묻게 만든다.

그래서 12월 9일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의 한 페이지를 넘겨보는 작업을 넘어서서 오늘 우리가 어느 편에 서서 무엇을 위한 말을 선택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는 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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