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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2월 8일(1943년), 이윤재 옥사 – 한글을 지키다 감옥에 남겨진 이름


1. 함흥형무소의 겨울, 이름이 멈춘 아침

1943년 12월 8일 아침, 함흥형무소의 겨울은 유난히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철창 사이로 스며든 바람은 살갗을 넘어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좁은 감방 안 공기는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날 새벽, 교도관들이 차갑게 닫힌 철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병색이 깊었던 한 수감자는 이미 숨을 멈춘 뒤였다.

그의 이름은 이윤재였다.
국어학자이자 교사였고,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동료들과 함께 조선어학회에 몸을 실었던 사람이었다.
신문에 실린 짧은 기사에는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된 일인 사망”이라는 문장만이 담담하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한 줄 뒤에는 사전과 단어, 문장과 발음, 그리고 한 민족의 언어를 지키려 했던 긴 싸움의 시간이 겹겹이 숨어 있었다.

감방 안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떠올렸을 장면이 무엇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서울 인쇄소의 잉크 냄새였을 수도 있었고, 교단에 서 있던 교실의 풍경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아직 채우지 못한 조선어 사전의 빈 항목들, 비어 있는 종이 위에 적어야 했던 수많은 단어들에 대한 아쉬움이었을지도 모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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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선어학회와 사전 편찬이 ‘위험한 일’이던 시대

조선어학회는 겉으로 보면 학자들과 교사들이 모여 언어를 연구하는 단체에 불과해 보였다.
한글 맞춤법을 정리하고, 표기법을 통일하고, 조선어 사전을 만들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모임이었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국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할 공익적 연구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일제는 한글을 ‘조선어’라 부르며 토착 방언 정도로 낮추고, 일본어를 ‘국어’라 부르며 언어의 서열을 만들어 두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고, 공문서와 신문에서도 한글의 자리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어 사전”은 단지 책 한 권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묶인 생각의 세계와 기억의 뿌리, 삶의 방식을 한데 모아 붙잡으려는 시도였다.
이윤재와 동료들에게 사전 편찬은 학문이면서 동시에 저항이었다.
말을 지키는 일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과 겹쳐지던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의 책상 위에 올려진 카드 한 장, 원고지 한 장까지도 감시의 대상이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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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전이 내란이 되던 공기, 조선어학회 사건

1942년, 일제는 마침내 조선어학회를 정조준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그 모임은 갑자기 “치안 방해”와 “내란 음모”의 온상으로 규정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의 죄목에는 ‘사상 범죄’라는 단어가 붙었고, 조선어 사전 편찬 작업은 ‘민족 의식을 고취해 제국에 반항하게 할 음모’로 재해석되었다.

언어를 연구하는 일이 곧 정치 행위가 되었고, 문장을 다듬는 일이 곧 범죄가 되었다.
조사 하나, 어미 하나, 표기 하나를 놓고 토론하던 회의실은 순식간에 ‘불온한 집회 장소’로 바뀌었다.
책상 위에 흩어져 있던 카드와 원고지는 압수되어 증거물이 되었고, 서가에 꽂혀 있던 책들은 구속영장의 뒷면을 채우는 목록이 되었다.

이윤재를 비롯한 학자들은 헌병대와 경찰서에서 수차례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그들에게 건넨 질문은 사전이나 문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와 어울렸는지, 어떤 생각을 나누었는지,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지,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지 같은 질문들이 집요하게 이어졌다.
일제에게 “조선어”는 더 이상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지워야 할 위험한 흔적이자 탄압해야 할 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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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함흥형무소의 병든 몸, 기록에 남지 않는 이야기들

함흥형무소로 이감된 뒤, 이윤재의 몸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 열악한 위생과 추위가 겹치면서 건강은 눈에 띄게 쇠약해졌다.
수감 동료들은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겨울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숨소리는 점점 짧고 가팔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동료들과 나누는 짧은 이야기 속에서 끝까지 “말”을 붙잡았다고 전해진다.
감방 안에서 서로가 기억하는 단어들을 주고받거나, 사전 편찬 과정에서 겪었던 일화를 떠올리며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아직 채워 넣지 못한 항목들, 초고로만 남겨 둔 표제어들, 정리되지 못한 방언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에게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3년 12월 8일, 그 버팀목은 결국 끊어졌다.
형무소가 남긴 공식 기록에는 사망 시각과 사인, 수감 번호, 이름 정도의 짧은 문장만 남았다.
그 어디에도 그가 어떤 책을 쓰려 했는지, 어떤 언어를 사랑했는지, 어떤 시대를 견디려 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언어를 지키려 했던 한 사람의 생은 그렇게 차가운 문서 한 장으로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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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해방 이후에 살아남은 언어와, 뒤늦게 제자리로 돌아온 묘

2년 뒤 광복이 찾아왔을 때, 이윤재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끌려갔던 동료들 중 일부는 살아 돌아왔고, 일부는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은 채 남은 생을 살아가야 했다.
그들이 감옥에서까지 붙들고 있던 원고와 노트, 머릿속에 남겨 둔 단어들의 조각은 해방 이후 조선어 사전과 국어사전 편찬 작업으로 이어졌다.

해방된 거리에는 다시 한글 간판이 걸리기 시작했다.
신문은 조선어로 기사를 채웠고, 학교 교실에서는 일본어 대신 한글 교과서가 나눠졌다.
아이들은 자기 이름을 자기 언어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언어는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천천히 되찾았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빈틈도 남았다.
함흥형무소에서 죽어 나온 사람들,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학자와 교사들, 끝내 복귀하지 못한 이름들이 있었다.
책은 다시 인쇄되었지만, 그 책을 만들던 사람들 상당수는 이미 자리에 없었다.
한글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곧, 그 길목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쓰러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뒤늦게나마 그의 이름은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2013년, 대구 달성군 다사읍 마천산 기슭에 있던 그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다.
지금 이윤재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한 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한때 조선어 사전을 만든다는 이유로 내란 혐의를 뒤집어쓰고 감옥에서 죽어 간 사람의 무덤이, 이제는 ‘애국지사’라는 이름 아래 국가가 지키는 묘역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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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늘 자판 위의 한글과, 12월 8일을 다시 적는 일

지금 우리는 휴대전화 자판 위에서 너무 쉽게 한글을 두드리고 있다.
짧은 메시지를 보내고, 긴 글을 쓰고, 온라인에 생각을 남기는 일은 별다른 용기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맞춤법 검사기는 실수를 곧바로 표시해 주고, 사전 앱은 모르는 단어의 뜻을 즉시 보여 준다.

그러나 1943년 12월 8일 함흥형무소의 새벽을 떠올리면, 이 당연해 보이는 일들이 실제로는 누군가의 감옥살이와 죽음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선명해진다.
사전을 만든다는 이유로 범죄자가 되었던 시대와, 사전이 스마트폰 속 기본 기능이 된 시대 사이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시간축 위에서 곧바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12월 8일이라는 날짜를 다시 적어 보는 일은 단지 옛 사건을 추모하는 의식만은 아니다.
이 언어를 지키기 위해 감옥에서 죽어 간 이름들, 고문을 견디며 단어를 떠올리던 사람들, 해방 이후에도 상처를 안고 사전을 붙들던 세대 전체를 함께 떠올리는 일에 가깝다.
오늘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고 있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몸, 고통과 의지 위에 놓여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12월 8일의 이윤재를 기억하는 일은, 과거를 애도하는 슬픈 의식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이 언어로 어떤 말을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조용한 다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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