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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2월 10일(1948년), 세계인권선언 – 전쟁 폐허 위에 적어 넣은 ‘인간의 존엄’


1. 파리 샤요궁에 모인 전쟁 이후의 얼굴들

1948년 12월 10일, 파리 샤요궁 회의장에는 겨울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바깥 공기는 벌써 어둑해졌고, 센 강 건너편 도시의 불빛은 아직 전쟁의 상흔을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유럽 도시의 벽과 골목에는 폭격 자국과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먼지 쌓인 폐허와 임시 가설 건물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날 샤요궁으로 모여든 각국 대표들은 그런 풍경을 지나 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들은 두꺼운 양복과 코트를 의자 등에 걸쳐 둔 채 긴 책상에 나란히 앉아 서류 뭉치를 천천히 넘겼다.
책상 위에는 각국 이름이 적힌 작은 팻말과 통역용 이어폰, 잉크가 조금 묻은 메모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서류 속에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과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수용소와 가스실, 집단 학살로 이어진 전쟁의 시간 동안 이 단순한 말은 너무 쉽게 짓밟혔다.
그날의 회의는 그 잔해 위에서 다시 한 번 인간의 최소한을 글자로 새기려는 조용한 시도였다.

표결을 앞둔 회의장은 잠시 고요해졌다.
의장석 앞에서는 출석국과 절차를 확인하는 짧은 안내가 이어졌고, 대표들은 박수 대신 숨을 고르며 손을 들어 찬반을 밝힐 순간을 기다렸다.
샤요궁의 겨울 저녁은 새로운 강대국의 탄생을 알리는 의식이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라는 한 줄의 약속을 세상 앞에 내보이려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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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살 이후, 인권이라는 말을 다시 찾는 길

세계인권선언이 샤요궁 회의장에 올라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전쟁 직후 사람들은 먼저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전범 재판을 열어 학살과 고문, 인도에 반한 죄를 법정에 세웠다.
나치 지도자들이 피고석에 앉아 있는 사진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라는 말이 더 이상 변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러나 재판이 끝난 뒤에도 “국가가 법이라는 이름으로 악을 저지를 때, 개인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홀로코스트와 강제수용소, 민간인 폭격과 인종 학살은 국가의 허가와 법률의 보호 아래 진행됐고, 그 안에서 개인은 거의 무력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국가가 정한 법보다 더 앞서는 기준이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유엔이 1945년에 출범했을 때, 헌장 전문에는 이미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남녀와 크고 작은 나라들의 동등한 권리를 재확인한다”라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헌장 속 그 한 문장만으로는 식민지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독재 정권 아래 놓인 시민들의 삶을 실제로 바꾸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유엔은 “인권” 자체를 다루는 별도의 문서를 만들기로 했고, 1946년 인권위원회를 설치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인권위원회가 떠안은 과제는 단순하지 않았다.
인간의 권리를 국가보다 우선하는 기준으로 세우면서도, 각 나라가 가진 정치 체제와 문화, 종교를 한꺼번에 부정하지 않는 언어를 찾아야 했다.
그 작업은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전쟁 이후 인류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다시 정의할 것인지 묻는 철학적 실험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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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초안을 쓰던 사람들, 샤요궁까지 이어진 문장

초안을 쓰는 일은 몇몇 사람의 손에서 시작됐다.
캐나다 출신 법학자 존 피터스 험프리는 유엔 사무국의 작은 방에 앉아, 책상 위에 수십 장의 메모와 각국 헌법, 노동헌장, 권리선언문을 펼쳐 두고 첫 초안을 작성했다.
그는 프랑스 인권선언과 미국 독립선언, 국제노동기구의 문서들에서 문장을 옮겨 적어 카드에 붙여 가며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권리 목록”을 만들려고 했다.

그 초안을 다듬는 역할은 프랑스 법학자 르네 카생이 맡았다.
카생은 프랑스 혁명기의 인권선언과 여러 나라의 헌법을 참고하면서, 험프리의 초안을 보다 간결한 구조와 문장으로 정리했다.
그는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추상적인 이상이 아니라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구체적 현실을 마음속에 떠올렸다.


이 작업을 이끈 얼굴은 미국의 엘리너 루스벨트였다.
그녀는 유엔 인권위원회 의장으로서 각국 대표들을 설득하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정치적 역할을 맡았다.
엘리너는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었다가, 전쟁 이후 세계 질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이 문서가 서류함 속에만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레바논의 철학자이자 외교관 찰스 말리크, 중국 대표 장군매, 칠레 대표 에르난 산타 크루스 등도 각자 다른 전통과 경험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했다.
서방 국가들은 표현의 자유와 재산권을 강조했고, 사회주의 국가들은 노동권과 사회권을 빼놓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지배와 인종차별을 겪어 온 나라들은 인종과 민족, 피지배 민족의 권리를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 인물들은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두고 논쟁을 이어 갔다.
그 긴 토론과 수정을 거치며 세계인권선언의 문장은 조금씩 형태를 갖추었고, 마침내 샤요궁 회의장으로 올라갈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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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채택의 순간과 선언이 품은 문장들

세계인권선언이 최종안으로 의제에 올랐을 때, 이미 수십 차례의 문구 수정과 재협의를 거친 상태였다.
문서의 첫머리는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과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문장으로 열렸다.
이 짧은 문장은 인간의 가치를 국가나 인종, 종교, 재산보다 먼저 세우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 아래 조항들은 고문과 노예제의 금지, 자의적 체포와 추방 금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차례로 적었다.
사생활과 가족, 주거의 불가침, 표현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와 결사의 자유도 이어졌다.
교육을 받을 권리, 노동에서의 정당한 대우,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까지, 당시 기준으로도 폭넓은 권리 목록이 한 문서 안에 담겼다.


표결 결과, 48개국이 찬성했고 8개국이 기권했으며 반대표는 나오지 않았다.
기권한 나라들 사이에는 소련과 동유럽 일부 국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서로 다른 이유로 선언의 일부에 동의하지 못한 국가들이 있었다.
어떤 국가는 “주권 국가 위에 인류 보편의 기준을 세우는 발상”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고, 어떤 국가는 종교와 가족, 문화에 관한 조항이 자국 현실과 충돌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이 문서는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가 함께 선포한 인권의 공통 언어”라는 자리를 얻었다.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세계인권선언은 이후 각국 헌법과 인권조약, 국제 규범의 모형이 되었다.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사람들은 마침내 국가와 이념을 넘어서는 기준 하나를 종이 위에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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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선언과 현실 사이의 긴 간격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뒤에도 현실은 선언의 문장을 쉽게 따라오지 못했다.
식민지에서 독립을 요구하던 나라들은 여전히 제국의 군대와 경찰에 의해 억압을 받았다.
인종차별은 미국과 남아프리카, 유럽 곳곳에서 여전히 일상적인 풍경으로 남았고, 여성들은 투표권을 얻은 뒤에도 임금과 교육, 정치 참여에서 뒤로 밀려났다.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던 국가들조차 다른 이념과 사상을 탄압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세계인권선언은 화려한 서명식과 달리, 거리와 공장, 감옥과 농촌에서는 당장 체감되기 어려운 문서였다.
그러나 이 선언은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문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말을 언젠가 법정과 거리에서 소리 내어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준이 생겼다.
민권운동, 탈식민 운동, 민주화 투쟁, 여성과 장애인의 권리를 위한 싸움은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인권선언의 조항을 근거로 삼았다.
사람들은 구금되고, 해고되고, 쫓기면서도 이 문서에 적힌 “인간” 속에 자기 얼굴이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민주화 과정 역시 이 흐름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유신과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헌법 조항과 함께,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의 문장을 들고 거리에 섰다.
선언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메우려는 오랜 시간이 흘렀고, 세계인권선언은 점차 “기념일의 문서”가 아니라 “투쟁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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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늘, ‘인권’이라는 말을 다시 입 안에 굴려 보는 일

오늘 우리는 “인권”이라는 말을 비교적 쉽게 사용한다.
뉴스 헤드라인과 정치인의 연설, 학교 수업과 기업의 홍보 문구까지 이 단어를 끌어다 쓴다.
그래서 때로는 이 말이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계인권선언의 첫 문장을 떠올려 보면, 이것이 얼마나 무거운 역사를 지나왔는지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과 권리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다”라는 문장은 당연한 상식처럼 들리지만, 이 문장을 확인하지 못한 시대에는 학살과 노예제, 고문과 강제노동이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가 오늘 “그건 인권 침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이미 세계인권선언은 자기 역할의 일부를 다한 셈이 된다.


지금도 난민과 이주민, 성소수자와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는 여전히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
경찰의 폭력, 혐오의 언어, 온라인에서의 집단 괴롭힘, 직장과 가정에서 벌어지는 차별은 세계인권선언의 문장을 매일 시험대에 올린다.
그 앞에서 우리는 “국가 안보와 경제 성장,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12월 10일을 기억하는 일은 오래된 문서의 생일을 기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 사람도 인간이다”라는 가장 단순한 문장을 다시 입 안에서 굴려 보는 일에 더 가깝다.
전쟁 폐허 위에서 적어 넣은 세계인권선언의 첫 문장은, 아직도 완성되지 않은 숙제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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