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정희 이후, 그러나 아직 유신이 끝나지 않았던 시간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는 ‘결혼식 하객’들이 모여 있었다. 청첩장에는 연세대 복학생 홍성엽과 윤정민의 결혼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시간은 오후 5시 30분, 장소는 YWCA, 주례는 함석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청년의 결혼식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는 실제 결혼식이 아니라, 유신체제의 연장을 막기 위한 재야 인사들과 청년들의 정치 집회였다.
불과 한 달 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유신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0월 2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유신헌법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이른바 ‘체육관 간선제’를 한 번 더 반복하려 했다. 기대했던 변화 대신, 유신의 문법이 그대로 연장되는 장면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두가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재야 인사와 종교계, 청년·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엄령 아래에서 공개적인 집회를 연다는 것은 곧바로 체포와 고문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누군가가 제안한다. “그럼 집회를 결혼식으로 위장하자.”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은 이렇게, 한 사회가 권력을 향해 던진 질문의 형식을 ‘결혼식’이라는 일상적 의식 속에 숨겨 넣는 방식으로 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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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존하는 신랑과 가상의 신부, 그리고 펼쳐진 ‘결혼식’
위장결혼식의 형식은 치밀하고도 상징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랑 홍성엽은 실제 인물이었다. 연세대 복학생이자 민주청년협의회에서 활동하던 청년으로, 자신이 ‘얼굴’을 내세우겠다고 자원했다. 반면, 신부 윤정민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신부 윤형중의 이름에서, ‘정민’은 ‘민주정부(民主政府)’의 앞글자를 따온 조합이었다. 신랑은 실존하고, 신부는 ‘민주정부’라는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구조. 이 설정 자체가 당시 집회의 목적과 감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결혼식은 철저히 의식의 형식을 따랐다. 청첩장이 돌았고, 하객들은 정장을 차려입고 하나둘 YWCA 강당으로 들어왔다. 강당에는 500여 명에서 많게는 1000여 명까지, 기록마다 조금 다르지만 상당한 인원이 빽빽이 들어찼다. 하객의 상당수는 윤보선, 함석헌, 백기완, 김병걸, 임채정, 문동환 등 잘 알려진 재야 인사들이었다. 모두가 ‘이 자리가 단지 혼례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는 듯 행동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순서에 따라 신랑 입장이 선언된다. 바로 그 순간, 준비해 둔 ‘취지문’과 ‘통대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위한 성명서’가 배포되기 시작한다. 이어 전 민주공화당 의원이었던 박종태가 마이크를 잡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를 반대하는 취지문을 낭독한다. 하객들은 박수와 함성으로 응답한다. 이때부터 이 자리는 더 이상 결혼식이 아니라 공개적인 정치 집회가 된다. 유신체제의 청산,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 거국민주 내각 수립, 군의 정치적 중립, 외세 간섭 거부 등의 구호가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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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첩장”에서 “연행장”으로, 강제 해산과 고문
당연히 이 상황을 군과 경찰이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계엄하에서 허가받지 않은 집회는 언제든 ‘소요’나 ‘불온행위’로 규정될 수 있었다. 결혼식이 집회로 전환되자, 곧바로 형사와 보안사 요원들이 강당 안으로 들이닥친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누군가는 성명서를 더 뿌리려 하고, 누군가는 구호를 외치며 끝까지 버티려 하지만, 곧이어 대규모 병력이 투입되면서 사람들은 강제로 밖으로 끌려 나온다.
YWCA를 빠져나온 일부 인사와 청년들은 명동 인근 거리에서 ‘유신 철폐’, ‘통대 선거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이어가지만, 이들 역시 곧 경찰에 의해 연행된다. 이 사건으로 총 140명 안팎이 체포되었다. 그중 양순직, 박종태, 백기완, 임채정, 이우회, 최열, 홍성엽 등 핵심 인사 14명은 용산구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나머지 인원에게도 불구속 입건과 서면조사, 가족에 대한 압박이 이어졌다.
고문 후유증과 삶의 파장은 길게 남았다. 홍성엽은 이후에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지만, 긴 투옥과 고문, 경제적 곤궁 속에서 평범한 삶의 기회를 상당 부분 잃어야 했다. 훗날 그가 사망했을 때, 언론은 “한 번의 위장결혼식에 자신의 인생 전체를 내던진 사람”으로 그를 회고했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고령 등의 이유로 서면조사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책임을 둘러싼 압박과 뒤이은 감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사건 이후 YWCA와 관련된 선교·청년 단체들에도 압력이 가해졌고, 이 사건을 언급하거나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이유만으로 추가 연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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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장결혼식’이 남긴 것: 민주화운동의 징검다리
YWCA 위장결혼식은 어떤 면에서는 실패한 집회였다. 집회는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강제 해산되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선출 절차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최규하는 결국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된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이 위장결혼식은 권력의 흐름을 즉각 바꾸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다른 층위에서 중요한 흔적을 남긴다.
첫째, 이 집회는 10·26 이후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재야·종교·청년 세력이 함께 한 첫 대규모 정치행동이었다. 박정희 사후의 권력 공백을 “유신의 연장”이 아니라 “문민정부, 민주정부로 가는 전환점”으로 만들고자 했던 시도의 한 장면이었다. 둘째, 이 사건에 참여했다가 연행·구속된 이들은 훗날 한국 정치와 시민사회 곳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임채정은 훗날 국회의장이 되고, 최열은 환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며, 한명숙은 국무총리를 역임한다. 민주화운동의 인적 네트워크와 경험이 이 사건 속에서도 촘촘하게 쌓였다.
셋째, 이 사건은 ‘계엄하에서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하나의 사례를 남겼다. 결혼식이라는 형식을 빌려 집회를 연다는 발상은, 권력이 공적 공간을 틀어쥐었을 때 일상의 언어와 의식을 빌려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점에서 YWCA 위장결혼식은 단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이후 다양한 문화적·상징적 저항 방식의 선행 사례로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훗날 김대중 정부 시기, 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면서, “그날 결혼식에 갔던 사람들”의 선택은 역사적 의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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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025년에 다시 읽는 ‘위장’의 의미
2025년에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을 다시 떠올리면, 몇 가지 질문이 우리 쪽으로 되돌아온다. 첫째, 우리는 지금 얼마나 ‘위장되지 않은 말’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검열과 계엄이 사라진 대신, 여론의 낙인, 온라인 마녀사냥, 경제적 불이익, 각종 심사·지원 제도의 불투명한 기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압박이 말과 행동을 조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말할 수는 있지만, “괜히 나섰다가 손해 볼까 봐” 스스로 침묵을 택하는 구조 역시 다른 의미의 자기검열이다. 그런 점에서 그때 누군가는 결혼식을 빌려서라도 말을 하려 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 불편한 거울이 된다.
둘째,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위장’이 곧 거짓이라는 뜻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위장결혼식은 결혼식을 빙자한 집회였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민주화 요구와 위험을 감수한 용기는 결코 가짜가 아니었다. 형식은 위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지극히 진지했다. 오늘날 정치와 시민운동, 혹은 각종 캠페인 속에서도 종종 ‘기획된 퍼포먼스’가 등장한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형식이 무엇을 위해 동원되고 있는지, 누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지다.
마지막으로, YWCA 위장결혼식은 민주주의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대통령 직선제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신체제는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로 잠시 이어졌지만, 이런 크고 작은 시도들이 모여 1987년 6월 항쟁으로, 그리고 오늘의 헌정 질서로 이어졌다. 위장결혼식에 참여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이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지만 체제에 질문을 던진 기억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오늘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반이 된 셈이다.
그래서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을 다시 쓰는 일은, 단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복기하는 작업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형식으로,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향해 말하고 있는지를 되묻는 작업이다. 언젠가 오늘의 어떤 장면도, 누군가에게는 “그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위장되지 않은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그 기록의 어느 편에 서 있을 것인지를, 이 오래된 위장결혼식 앞에서 조용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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