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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1월 23일 (1644년), 말을 미리 막지 말라는 한 편의 연설 ― 「아레오파지티카」와 오늘의 한국


1. 1644년 11월 23일, 허가받지 않은 한 권의 책

1644년 11월 23일, 런던의 한 인쇄소에서 허가받지 않은 얇은 책자가 찍혀 나간다. 제목은 길고도 낯설다.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 저자는 이미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존 밀턴이다. 당시 영국 의회는 ‘인쇄 허가제’를 통해 모든 책을 출판 전에 심사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책, 종교적으로 이단이라 여겨지는 책은 애초에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밀턴의 책은 바로 이 제도를 향한 정면 비판이자, 의회 의원들에게 바치는 일종의 연설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지 않는다. 의회 편에 서 있던 청교도 지식인이, 자신이 지지하던 권력이 만든 검열 제도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다. 이 작은 책이 이후 수백 년 동안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 레퍼런스가 될 것이라고, 아마 그는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그날, 런던에서는 포탄 대신 문장이, 총성이 아니라 문장이 권력을 향해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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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밀턴이 두려워한 것: ‘선(先)검열’이라는 유혹

「아레오파지티카」가 겨누고 있는 핵심은 ‘출판 이전 검열’, 즉 선검열이다. 밀턴은 먼저 책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정의한다. 책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한 인간의 정신과 경험이 응축된 “살아 있는 지성”이라고 말한다. 잘 된 책 하나를 파괴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하나 죽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람은 다시 태어날 수 있지만, 한 시대에 한 번밖에 나오지 않을지 모르는 사상과 통찰은 한 번 잘려 나가면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므로 국가가 책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인간 이성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 자체를 불태우는 행위가 된다.

그는 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초대 기독교 사회의 예를 끌어온다. 그 사회들에도 위험한 책은 존재했지만, 대부분 출간 후에 문제를 삼았지, 애초에 인쇄를 못 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한다. 위험할 수 있는 책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출판을 금지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순간 시민은 더 이상 스스로 옳고 그름을 가려낼 기회를 잃는다. 밀턴에게 진짜 위험한 것은 나쁜 책이 아니라, 시민이 더 이상 읽고 판단할 필요가 없는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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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류를 통과해야 강해지는 진리

밀턴이 남긴 가장 유명한 주장 가운데 하나는 “진리는 오류와의 자유로운 싸움을 통해서만 더 강해진다”는 생각이다. 그는 진리를 유리상자 안에 넣어 깨지지 않게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 오류와 거짓과 부딪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실수도 하고,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실수와 토론의 경험을 통해, 진리는 단단한 설득력을 얻는다.

그래서 그는 의회에 묻는다. 만약 국가가 시민 대신 무엇이 진리인지 미리 골라 준다면, 그 사회의 도덕적 성숙은 어디에서 비롯되겠느냐고. 도덕적 인간은 유혹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유혹을 보고도 스스로 거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위험한 사상은 토론과 반박을 통해 이겨내야지, 애초에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밀턴은 심지어 “나쁜 책도 쓸모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경고판 역할을 한다. 진리는 깨끗한 방 안의 병약한 아이가 아니라, 거친 공기 속에서 면역을 얻는 존재에 가깝다.

「아레오파지티카」는 그래서 단순한 검열 반대 문서가 아니다. 그 글은 시민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국가가 대신 판단해야 한다는 ‘후견인 국가’의 논리를 거부한다. 시민의 이성을 신뢰하지 않는 권력은 결국 자기 자신도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는 통찰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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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21세기 한국에서 되살아난 검열의 그림자

이제 시선을 한국으로 옮겨 본다. 우리는 헌법에 표현과 출판의 자유가 명시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군부독재 시절처럼 명백한 금서 목록이 공표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형태만 바뀌었을 뿐, ‘읽지 못하게 만드는 권력’은 여전히 다른 이름으로 작동하고 있다.

먼저 법률 차원의 장치가 있다. 국가보안법이나 청소년유해매체물 지정 제도는, 안전과 보호를 명분으로 특정 책의 유통을 제한하는 데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어떤 책은 해외에서 번역·출간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수입이 금지되거나, 판매는 허용하되 청소년유해물로 묶여 사실상 서점에서 보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내용 전체가 폭력을 선동한다기보다는, 불편한 역사 해석이나 급진적인 정치 이론을 담고 있다는 이유가 앞세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법에 따른 심의”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한 번 골라 준 책만 안전하게 읽을 수 있는 구조를 강화하는 셈이다.

둘째는 공공기관과 학교, 군대 등 ‘폐쇄적 공간’에서의 사실상 검열이다. 일부 학교도서관에서는 민원이 들어왔다는 이유로 페미니즘 도서, 성소수자 관련 도서, 특정 정치인이나 사회운동을 다룬 책을 서가에서 빼거나, 학생이 쉽게 찾을 수 없는 창고로 옮기는 사례가 반복되었다. 공식적으로 금서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학생이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는 순간 그 책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군부대와 교도소에서는 보안과 질서를 이유로 외부 간행물 반입을 엄격히 제한하는데, 이 과정에서 비폭력적인 비판 서적이나 인권 관련 도서까지 포괄적으로 차단되는 경우가 있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된다.

셋째는 시장을 통한 간접 검열이다. 특정 출판사의 책이 ‘편향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공공도서관의 도서 구입 목록에서 배제되거나,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진열되지 않는 일들이 있다. 보조금 지원 사업이나 도서 선정 위원회에서 불명확한 기준으로 탈락하는 것도 비슷한 작동 방식이다. 명령 형태의 검열은 아니지만, 경제적 불이익과 이미지 손상을 통해 일부 목소리를 조용히 밀어내는 방식이다. 시민은 이 과정을 투명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기준이 적용되었는지 묻기도 힘들다. 결과적으로는 일정한 스펙트럼 밖에 있는 책들이 처음부터 ‘리스크가 큰 상품’으로 취급되어 기획 단계에서부터 사라진다.

이 모든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사회적 파장을 우려한다”, “청소년 보호가 필요하다”, “민원이 많다” 같은 표현이다. 이유는 언제나 그럴듯하다. 그러나 밀턴의 시선에서 보자면, 이는 시민의 이성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위험한 사상을 논쟁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신뢰보다는, 보지 못하게 하는 편이 덜 번거롭다는 행정 편의가 우선될 때, 검열은 다시 부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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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읽을 권리’를 지키는 일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다

「아레오파지티카」는 발표 당시 의회를 설득하지 못했다. 인쇄 허가제는 그 자리에서 폐지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년, 수백 년이 흐르며 이 글은 계속 인용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언론·출판의 자유를 설계할 때, 표현의 자유 소송에서 법원이 원칙을 설명할 때, 밀턴의 문장들은 반복해서 소환되었다. 그는 결국 제도를 바로 뒤집지는 못했지만, 그 제도를 정당화하기 어렵게 만드는 언어를 남겼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 글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검열은 늘 “예외적인 상황”을 이유로 등장한다. 안보 위기, 사회 혼란, 미성숙한 청소년, 정치적 편향에 대한 우려 같은 말이 앞에 붙는다. 그러나 예외는 늘 넓어지려는 성향이 있다. 한 번 “이 정도는 막아도 괜찮다”는 선을 허용하면, 다음 선을 그을 때는 조금 더 쉬워진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우리는 무엇이 ‘스스로 선택한 침묵’이고 무엇이 ‘보이지 않는 검열의 결과’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밀턴은 “나쁜 책도 세상에 나오게 두어라. 대신 그것이 왜 나쁜지 말할 수 있는 힘을 시민에게 길러 주어라”라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가 진짜로 고민해야 할 지점도 여기다. 책을 더 많이 금지할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이 읽고 싸우고 토론할 것인가. 출판·도서 정책이 향해야 할 방향은 ‘읽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들이 안전하게 부딪칠 수 있는 장을 넓히는 데 있다. 공공도서관과 학교, 공공기관은 바로 그런 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1644년 11월 23일, 런던의 한 인쇄소에서 찍혀 나온 작은 책은 지금 우리에게도 조용히 묻는다. 국가와 사회는 시민의 판단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가. 어떤 책을 읽을지 결정할 권리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읽지 못한 채 사라지고 있는 수많은 문장들을 기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읽을 권리”를 지키는 일은 단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믿는지 시험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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