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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15일(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그리고

[프롤로그: 이웃님들께 부치는 편지]

나의 블로그를 찾아와 읽어주시는 100여 분의 고마운 이웃님들께, 오늘은 양해의 말씀을 먼저 구합니다. 달력 속 1월 15일은 한국 프로야구의 효시인 'OB 베어스'가 창단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보통 때라면 프로야구의 역사를 객관적인 사실들로 정리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기억들을 꺼내보려 합니다.

저도 이제 늙어가나 봅니다. 오늘의 역사가 어느새 낡은 어제의 추억이 되어버리고, 그 지나간 시간을 홀로 돌아보니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이것은 야구공 하나에 웃고 울었던, 그리고 그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버텨낸 한 야구 키드의 독백입니다. 부디 편안하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모순의 개막: 1982년, 최루탄 연기 너머로 날아온 하얀 공

역사는 종종 가장 모순적인 순간에 가장 화려한 불꽃을 피워 올린다. 1982년 1월 15일, OB 베어스의 창단식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의 막이 올랐을 때, 나는 그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진 어두운 그림자를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민주화의 열망을 잠재우기 위해 소위 '3S 정책'이라는 달콤한 마취제를 뿌리고 있었다. 야구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하지만 당시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낮에는 독재 타도를 외치며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밤이 되면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박철순의 연승 행진에 환호했다. 우리는 독재자를 경멸하면서도 그가 깔아준 그라운드 위에서 땀 흘리는 선수들의 투혼만큼은 '진짜'라고 믿고 싶었다. 정치적 억압을 정권이 제공한 스포츠로 해소해야 했던 그 기묘한 이율배반. 한국 프로야구는 태생부터 이토록 슬픈 모순을 안고 태어났고,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 모두는 야구공 실밥처럼 얽히고설킨 아이러니한 존재들이었다.

 

2. 롯데 껌과 맛동산: 혀끝으로 배운 분단

독재 권력이 조장한 지역감정은 어른들의 투표용지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군것질 취향까지 철저하게 지배했다. 부산 꼬맹이에게 세상은 '롯데 자이언츠'와 '그 나머지'로 나뉘어 있었다. 부산의 슈퍼마켓을 점령한 롯데 껌과 가나 초콜릿을 먹는 건 일종의 '애향심'이었다. 반면, 호남을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의 과자는 우리에게 '금단의 열매'였다. 해태 맛동산이나 홈런볼은 왠지 모르게 꺼려지는, 대놓고 먹기에는 묘한 죄책감이 드는 대상이었다. 김봉연, 김성한 같은 타자들이 검빨 유니폼을 입고 타석에 들어서면 어린 마음에도 오금이 저릴 정도의 위압감을 느꼈다. 롯데가 해태를 이기는 날이면 마치 부산이 광주를 이긴 것처럼 으스대던 그 유치하고도 잔인했던 이분법의 세계. 나는 맛동산 한 봉지조차 마음 편히 집어 들지 못하는, 지역감정의 포로로 유년기를 보냈다.

 

3. 자율화 세대의 낭만과 부채감: 1991년, 도서관 옥상에서

1980년대 후반, 우리는 교복 자율화 세대였다. 획일적인 검은 교복 대신 청바지와 유명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자유롭게 학교를 누볐던 그 시절. 하지만 1991년, 대학생이 되어 마주한 세상은 그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해 5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시작으로 '분신 정국'이 이어졌다. 꽃다운 친구들이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스러져갔고, 강의실보다는 아스팔트 바닥이 더 익숙한 날들이 이어졌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도서관 옥상에 올라가 나는 몇 번이고 숨을 멈추려 했다. 동시대의 친구들은 죽어가는데, 나는 살아남아 밥을 먹고 야구 스코어를 궁금해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91학번이라는 이름표 뒤에는 항상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나는 그 무거운 마음의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독한 소주를 삼키며 "버틴다"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4. 1992년의 구원: 흙투성이 유니폼을 입던 내 후배 염종석

그 질식할 것 같던 죄책감의 터널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찾아온 구원이 바로 1992년의 롯데 자이언츠였다. 그리고 그 기적의 중심에는 내 모교 부산고등학교 직속 후배, 고졸 신인 염종석이 서 있었다. 우리가 교복 자율화라며 사복을 입고 멋을 부릴 때, 흙먼지 뒤집어쓴 유니폼을 입고 묵묵히 운동장을 뛰던 그 야구부 후배. 깡마른 몸에 금테 안경을 쓰고 마운드에 올라 거인 군단을 이끄는 그의 모습은 충격이자 감동이었다. 염종석은 신인의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시리즈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아버지는 TV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고, 나 또한 사직구장의 찢어진 신문지 응원 속에 섞여 목이 터져라 "부산 갈매기"를 불렀다.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의 승리가 아니었다. 시대의 우울함에 짓눌려 있던 나에게,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내 학교 후배'의 쾌거였다. 내 20대 시절 유일하게 허락된, 죄책감 없는 순수한 행복의 순간이었다.

 

5. 무너진 세계와 아버지의 15회 말: 1997년의 겨울

그러나 삶의 봄날은 짧았고, 겨울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졸업을 앞둔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재난을 맞닥뜨렸다. '한강의 기적'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거리는 실직자들로 넘쳐났다. 기업들이 줄도산하던 그해, 나의 우주였던 아버지마저 쓰러지셨다. 뇌사 상태. 기약 없는 기다림. 아버지는 차가운 중환자실에서 기계 호흡에 의지한 채 꼬박 1년을 버티셨다. 마치 1987년의 최동원이 15회까지 마운드를 지켰듯이, 아버지 또한 집안과 사회로 내던져질 아들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태워 마지막 연장전을 치르신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병실의 기계음 소리를 들으며 1991년의 부채감과는 또 다른, 생존을 위한 처절한 '버팀'을 배워야 했다. 나라가 망하고 아버지가 쓰러진 그 폐허 위에서, 1992년의 그 뜨거웠던 함성은 아득한 전생의 기억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6. 서울살이와 맛동산: 경계를 넘어 섞인다는 것

생존을 위해 서울로 올라온 지 수십 년. 낯선 서울의 편의점에서 나는 무심코 해태 맛동산 한 봉지를 집어 든다. 부산에서는 눈치를 보며 몰래 먹어야 했던 그 금단의 과자가, 이곳 서울에서는 롯데 과자와 아무렇지 않게 섞여 있다. 처음 내 돈으로 사 먹은 맛동산은 달콤하고도 씁쓸했다. 고작 이 과자 한 봉지가 뭐라고 우리는 그토록 서로를 미워하고 선을 그었을까. 부산고 출신의 내가 서울에서 해태 과자를 씹으며 야근을 하는 밤. 내 삶은 그렇게 부산과 서울, 롯데와 해태,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일상이 비빔밥처럼 섞이며 흘러왔다. 독재가 쌓은 지역감정의 벽은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그리고 흐르는 세월 앞에서 조금씩 허물어져 갔다.

 

7. 희망 바스켓: 다시 부르는 부산 갈매기

 

이제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된 나는, 여전히 내 마음속 '희망 바스켓' 가장 깊은 곳에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을 담아두고 산다. 누군가는 철없다 비웃을지 모르지만, 이것은 단순한 승패의 문제가 아니다. 교복 자율화 세대의 낭만, 진실을 알게 된 1991년의 부채감, 그리고 아버지가 온몸으로 버텨준 1997년의 겨울을 모두 관통해 살아남은 내 인생에 주는 '지각된 보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시 사직구장에 우승 깃발이 휘날리는 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아버지, 그리고 내 자랑스러운 후배 종석아. 보소, 우리가 그 모순된 세월을 다 견디고 결국 오늘을 봤심더."

그날이 오면, 나는 가장 뜨거운 눈물로 내 인생의 15회 말을 완투할 것이다. 최동원과 선동열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