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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월 14일 (1987년): 야만의 시대를 끝낸 불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1. 제5공화국의 어둠이 집약된 공간, 남영동 509호실의 참극

 

1987년 1월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잔혹하고도 어두운 겨울의 한가운데였다.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 속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철저히 짓밟히고 있었다. 그 야만의 정점이 폭발한 날이 바로 1월 14일이었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스물한 살의 청년 박종철은 이날 밤,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소속 형사들에게 불법 연행되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용산구 갈월동, 간판조차 없이 높은 담벼락과 검은 벽돌로 둘러싸인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고, 안에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설계된 그 건물의 5층, 특히 방음벽으로 둘러싸여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못하는 509호 조사실에서 지옥도가 펼쳐졌다. 경찰은 수배 중이던 박종철의 대학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추궁했으나, 박종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에 조한경, 강진규 등 고문 기술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잔혹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좁은 욕조에 머리를 강제로 처박는 물고문이 반복되었고, 그 과정에서 전기 고문까지 자행되었다. 결국 다음 날인 1월 15일 정오경, 건장했던 청년 박종철은 차디찬 조사실 바닥에서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질식사하고 말았다.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명백한 살인이었다.

 

2. 역사상 가장 오만하고 황당한 궤변: 조작과 은폐의 시나리오

 

박종철의 사망을 확인한 경찰 수뇌부는 패닉에 빠졌다. 86 아시안게임의 성공적 개최와 다가올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정권의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그들에게 서울대생 고문치사 사건은 정권의 존립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핵폭탄급 악재였다. 치안본부장 강민창을 비롯한 수뇌부는 즉각적인 은폐 공작에 돌입했다. 그들의 첫 번째 계획은 시신을 화장하여 영구히 증거를 인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사인 조작이 선행되어야 했다. 1월 16일, 경찰은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에 길이 남을 망언이자 궤변을 늘어놓는다. "조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피의자가 '억' 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망했다." 이는 국민을 우매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서는 내뱉을 수 없는, 독재 정권의 오만함이 극에 달한 표현이었다. 그들은 사인을 단순 심장쇼크사로 위장하기 위해 최초 왕진 의사에게 허위 사망진단서 발급을 강요했고, 유족들에게는 시신을 보여주지 않은 채 서둘러 화장 동의를 받아내려 혈안이 되었다. 거대한 국가 기구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한 청년의 억울한 죽음을 ‘없었던 일’로 만들려던 이 시도는, 당시 정권이 얼마나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집단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 침묵의 카르텔을 깨뜨린 용기 있는 자들: 숨겨진 영웅들의 비사(秘史)

 

거짓이 진실을 영원히 덮을 뻔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각자의 위치에서 직업적 양심과 인간적 도리를 지킨 ‘숨은 영웅’들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야말로 박종철 사건의 가장 극적인 비사(秘史)이다. 첫 번째는 최초 왕진을 갔던 중앙대 용산병원 내과 의사 오연상이었다. 그는 조사실 바닥의 흥건한 물기, 복부가 부풀어 오른 시신의 상태, 그리고 폐에서 들리던 수포음(물소리)을 기억했다. 경찰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그는 화장실에서 마주친 동아일보 기자에게 "경찰 주장과 달리 물고문 가능성이 있다"는 결정적인 힌트를 흘렸다. 두 번째는 서울지검 형사부의 최환 검사였다. 경찰이 "심장마비 사체니 빨리 화장하게 지휘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직감적으로 타살을 의심했다. 경찰 간부들의 회유와 협박, 심지어 시신 탈취 시도까지 막아내며 그는 "아들이 죽었는데 얼굴도 안 보고 화장하는 부모가 어디 있느냐"며 부검을 관철시켰다. 이 결단이 없었다면 영구미제 사건이 될 뻔했다. 세 번째는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 박사였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직접 찾아와 거액의 뇌물과 승진을 미끼로 부검 소견 조작을 회유했으나, 그는 끝내 양심을 선택했다. 그의 부검 감정서에 적힌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와 '전신에 남은 피하출혈(전기고문 흔적)' 기록은 경찰의 거짓말을 부수는 과학적 스모킹 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 1월 16일 석간신문에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1단 기사를 내보내 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기지 또한 결정적이었다.

 

4. 감옥 안에서 터져 나온 진실의 목소리: 이부영과 교도관들의 비밀 작전

 

초기 은폐 시도가 실패하고 고문 사실이 일부 드러나자, 정권은 꼬리 자르기를 시도했다. 조한경, 강진규 두 명의 형사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 구속하고, 대가로 각각 1억 원(당시 강남 아파트 두 채 값)이라는 거액의 입막음용 돈을 지급하며 사건을 축소하려 했다. 그러나 진실은 가장 통제된 공간인 감옥 안에서 다시 꿈틀댔다.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된 두 형사는 자신들만 희생양이 되었다는 배신감과 억울함에 밤마다 울부짖으며 진상을 토로했다. 마침 바로 옆 감방에는 민주화 운동가인 이부영(전 국회의원)이 수감되어 있었다. 그는 형사들의 대화를 통해 사건의 배후에 더 높은 상부의 지시가 있었고, 범인이 축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때 또 다른 의인들이 등장한다. 당시 교도관이었던 전병용과 황의철이었다. 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이부영이 교도소 안에서 몰래 작성한, 사건의 전모(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닌 5명이며, 경찰 수뇌부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내용)가 담긴 비밀 쪽지를 바깥세상으로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했다. 이들의 목숨을 건 비밀 작전을 통해 감옥 밖으로 나온 진실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에게 전달되었다.

 

5. 6월의 불꽃이 된 청년의 죽음: 야만의 시대를 끝장내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김승훈 신부는 떨리는 목소리로 성명을 발표했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습니다!" 이 폭로는 대한민국 전체를 충격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국민들은 단순히 한 대학생이 죽었다는 사실을 넘어, 국가 권력이 국민을 고문해 죽이고, 그 사실을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 쳐 덮으려 했다는 명백한 증거 앞에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은 완전히 파탄 났고, 정권 유지를 위해 내세웠던 4.13 호헌 조치(대통령 직선제 거부)는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박종철의 죽음은 또 다른 희생인 이한열 열사의 최루탄 피격 사건으로 이어지며 분노의 기폭제가 되었다. 6월 10일, 전국을 뒤덮은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그리고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외침은 마침내 군부 독재 정권의 항복 선언인 6.29 선언을 이끌어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스러져간 스물한 살 박종철의 비극적인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한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승리의 봄을 여는 첫 번째 불씨가 되었다. 그의 희생은 국가 폭력에 대한 영원한 경종이자, 평범한 사람들의 양심이 모였을 때 얼마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서슬 퍼런 증거로 역사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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