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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두 개의 7월 17일

헌법의 날 그리고 노근리

                   1948년, 1950 두 개의 7월 17일



1. 제헌절, 나라가 태어난 아침


1948년 7월 17일, 한 장의 종이가 나라를 세웠다.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이 공포되던 날이었다.
긴 일제강점기를 지나, 그리고 남과 북이 분단되던 긴장 속에서, 이 나라는 드디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선언했다.
그날의 하늘은 무더웠고, 사람들의 옷깃은 헐렁했지만 눈빛은 단단했었다.
삼권분립, 국민주권,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헌법 속에 자리하며, 이 땅은 '민주공화국'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날 국회의사당에서는 이승만 국회의장이 헌법을 낭독했다.
기계도, 모니터도 없던 시절이었다.
낡은 마이크 앞에 선 그가 읽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새겨졌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 문장은 법조문이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오랜 꿈이기도 했다.

이 나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민도, 언론도, 국회도 아직 미완의 상태였지만, ‘헌법’이라는 약속만큼은 선명했다.
그것은 희망이었고,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었다.
나라를 세운 사람들의 손끝에서, 그리고 헌법의 조항들 속에서 미래가 설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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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해 뒤, 들판의 총성과 피


1950년 7월 17일,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
같은 날이었다.
하지만 그 아침엔 헌법도 국회도 없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3주가 채 되지 않았고, 이 땅은 다시 피로 물들고 있었다.
미군은 북으로부터 밀려 내려오는 공세에 대비해 후퇴 중이었고,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노근리의 다리 아래엔 수백 명의 양민이 모여 있었다.

그들 중엔 노인도, 아이도, 젖먹이도 있었다.
그 누구도 총을 들지 않았고, 반항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미군은 그들을 적으로 오해했고, 또는 그냥 제거해야 할 불확실성으로 여겼다.
기관차는 피난민들을 싣고 멈췄고, 곧이어 총성이 들려왔다.
기관총 사격은 수 시간 동안 이어졌고, 다리 아래에서 울린 비명은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했다.

나라는 있었지만, 그들은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했다.
헌법 제10조가 말하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말은, 그날의 들판에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들은 ‘국민’이 아니었던 걸까.
아니면 전쟁 앞에서 국민도, 이름도 모두 잊힌 존재가 되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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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법 앞에서 흘린 피와 눈물


노근리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국가는 침묵했고, 생존자들은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그러다 1999년, 미국 언론 ‘AP통신’이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과 자료를 바탕으로 사건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국가는 그제야 입을 열었고, 뒤늦은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진상은 끝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은 ‘의도된 학살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한국 정부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몇 줄짜리 유감 표명만 남긴 채, 진실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채 흘러갔다.
헌법 제1조가 외치던 ‘국민의 나라’는, 그날 그들에게 너무 멀고 조용했다.

그럼에도 생존자들은 법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은 나라에 복수를 요구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름을 되찾고 싶었고, 역사가 자신들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재판부는 ‘국가의 불법행위가 아니다’라며 판결을 내렸고, 법정은 다시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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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역사의 그림자, 기억의 무게


7월 17일은 그렇게 두 개의 얼굴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는 법이 태어난 날이고, 다른 하나는 법이 죽은 날이었다.
한쪽에선 나라가 시작되었고, 다른 한쪽에선 국민이 죽어갔다.
우리는 하나의 날에 두 개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셈이었다.

역사는 종종 이중적이다.
축하와 추모가, 건국과 학살이, 같은 날짜에 겹쳐진다.
그러나 진실은 늘 하나의 중심을 갖는다.
그날, 헌법은 국민을 약속했고, 전쟁은 그 국민을 무너뜨렸다.
헌법이 살아 있었다면, 노근리는 없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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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는 무엇을 잊지 말아야 했을까

그날, 우리는 나라를 얻었고 동시에 생명을 잃었다.
법은 종이에 있었고, 죽음은 흙 속에 있었다.
7월 17일을 기억한다면, 제헌절만이 아니라 노근리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이 나라가 진짜 국민을 위한 나라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제헌절은 더 이상 단지 기념일이 아니다.
그날의 헌법은 여전히 우리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헌법이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그리고 지금은, 과연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지를.

그날, 헌법이 공포되었고, 사람은 총에 맞았다.
그날, 우리는 세운 것과 무너진 것, 둘 다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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