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은 대본이 없다
1. 한송희 ― 오래된 무릎과 다시 뛰는 마음
한송희는 한때 국가대표였다.
부산으로 돌아가 학원 팀을 지도하며 살던 그는,
‘코트 위에서 뛰는 자신’을 완전히 잊었다고 믿었다.
무릎 수술 후 체중은 늘었고, 운동화 끈을 묶을 때마다 통증이 올라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연경의 전화가 왔다.
“송희야, 다시 뛰자.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처음엔 웃어넘겼다.
하지만 그날 밤, 손끝이 저려왔다.
그 감각은 공의 회전이 지나가던 자리였다.
첫 훈련 날, 체육관 공기는 차가웠다.
점프를 하자 무릎이 ‘뚝’ 소리를 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김연경은 말없이 옆에서 공을 주웠다.
“괜찮아요. 실수해도 돼요. 근데 다음엔 고쳐요.”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라는 명령처럼 들렸다.
한송희는 이후 매일 새벽 6시에 체육관에 도착했다.
조명이 켜지기도 전, 그는 혼자 서브를 넣었다.
손끝에 남은 공의 감각이 조금씩 돌아왔다.
두 달 후 첫 경기.
그의 첫 득점은 완벽하지 않았다.
공이 블로킹에 맞고 굴절됐지만, 상대 코트에 떨어졌다.
김연경이 벤치에서 손뼉을 쳤다.
“이겨야 하는 게 아니라, 배워야 해요.”
그 말에 송희는 웃었다.
오래된 무릎은 여전히 삐걱거렸지만, 마음은 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그는 복귀를 ‘끝’이 아닌 ‘다시 배움의 시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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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수빈 ―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받치는 사람
최수빈은 팀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그의 포지션은 리베로, 늘 구석에서 공을 받아내는 자리였다.
어릴 때부터 ‘키 때문에’ 포기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리시브 하나로 팀을 세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는 부산여고 출신으로, 고교 때부터 리시브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대학 진학 후 부상으로 한동안 경기를 쉬었다.
그 시절, 배구를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던 중 김연경이 언더독스 팀 구성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독님, 저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김연경은 짧게 답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말고, 잘하면 돼요.”
그 말은 수빈의 인생 방향을 바꿨다.
첫 경기에서 그는 서브 리시브를 연달아 실수했다.
관중석이 조용해지고, 자신이 팀의 리듬을 깨고 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하지만 김연경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대신 다가와 말했다.
“괜찮아요. 다음 공으로 바로 잊어요.”
그 순간, 수빈은 울컥했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 대신, ‘다시 하면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
다음 랠리에서 그는 몸을 던졌다.
공이 팔에 닿고, 손끝이 저리도록 반사됐다.
그 공은 곧 공격으로 이어졌고, 득점이 됐다.
그날 밤, 그는 공을 꼭 쥐고 말했다.
“감독님 말이 맞아요. 다음 공으로 잊으면 돼요.”
그는 작은 체구로, 팀의 가장 넓은 공간을 지켜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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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나연 ― 공보다 자신을 세팅하는 법
이나연은 세터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긴 슬럼프를 겪은 선수였다.
한때 팀의 주전이었지만, 어깨 부상으로 코트를 떠나야 했다.
의사는 말했다. “이제는 던지지 마세요.”
하지만 세터에게 던지는 일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었다.
김연경은 그를 불렀다.
“급하지 않아. 대신 매일 와요.”
훈련 첫날, 손끝이 공의 회전을 따라가지 못했다.
네트를 넘기지 못한 공이 바닥에 떨어졌다.
김연경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그 대신 그 옆에 앉아 있었다.
“감각은 기다리면 와요.”
그는 매일 훈련이 끝난 뒤에도 체육관에 남았다.
혼자 공을 던지고, 떨어지는 궤적을 눈으로 따라갔다.
손목의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공이 그리는 곡선을 다시 기억했다.
한 달 후, 첫 경기.
처음 세트를 올리는 순간,
그는 공을 보기보다 팀을 보았다.
“이겨야 하는 게 아니라, 배워야 해요.”
김연경의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은 천천히 네트를 넘어 완벽한 곡선을 그렸다.
공이 떨어질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을 다시 세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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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진 ― 세터의 시간은 길다
이진은 스무 살이었다.
대학 리그 경험도 부족했고, 코트에서는 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김연경은 그런 그를 보고 말했다.
“공 올릴 때 생각 너무 하지 마요.”
“근데 잘못되면 어떡해요.”
“그럼 다음에 고치면 돼요.”
그 대화가 이진을 바꿨다.
처음엔 속공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공이 낮게 가거나 너무 높게 가기도 했다.
하지만 김연경은 그때마다 말했다.
“이 공, 우리 거예요. 다음에 더 좋게 해봐요.”
그는 훈련 후 몰래 김연경의 연습 영상을 찾아봤다.
그녀가 예전 세터들과 주고받던 합, 손끝의 각도, 시선의 높이.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흉내 내며 손끝에 익혔다.
첫 경기에서 이진은 떨리는 손으로 공을 올렸다.
그 공이 네트를 넘어가고, 공격수가 강타를 꽂았다.
체육관이 환호로 가득 찼다.
김연경이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지금은 이기는 게 아니라 버티는 거예요.”
그날 이진은 알았다.
세터의 시간은 길다는 말이,
사람을 기다려주는 시간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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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김연경 ―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
경기가 끝난 밤, 체육관에는 조용한 숨소리만 남았다.
공 몇 개가 바닥을 구르며 멈췄다.
김연경은 천천히 걸었다.
손에 쥔 휘슬은 더 이상 지도자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날의 장면을 하나씩 떠올렸다.
한송희의 무릎,
최수빈의 다이빙,
이나연의 손끝,
이진의 떨림.
그녀는 그들을 꾸짖은 적이 없다.
단지, 그들의 두려움이 자신과 닮아 있음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대본은 없어요. 진심은 남아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불이 꺼진 체육관,
공 하나가 구석에서 멈췄다.
그녀는 그 공을 주워 든 뒤 조용히 웃었다.
“이 팀, 나보다 훨씬 강해요.”
그 말이 끝나자,
어둠 속에서도 땀 냄새와 공의 냄새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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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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