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점화(點火) 구간 (31℃~60℃)
서늘한 각성 46℃
맹렬했던 온기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1. 온기의 증발, 그리고 투명하게 드러난 거짓 확장
나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던 타인의 온기는 그리 오래 머물지 않았다. 나의 단단했던 고체의 껍데기를 액체처럼 녹여내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구원이자 합일이라 믿게 만들었던 그 압도적인 열은, 정작 스스로의 비정상적인 강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예고 없이, 그리고 허무하게 증발해버렸다. 마치 뜨거운 물이 쏟아져 들어왔던 유리병에서 물을 순식간에 비워낸 것처럼, 타인의 호흡과 숨결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끈적한 액화의 잔여물이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투명하고 아찔한 공백만이 서늘하게 차올랐다. 한때는 그 뜨거운 침입이 나를 한계 너머로 확장시키고 있다고 미친 듯이 믿었다. 타인의 체온이 나의 혈관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수록, 나는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마침내 더 단단하고 완성된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고 뼈저리게 착각했다. 그러나 맹목적이었던 열이 빠져나간 차가운 각성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그것은 주체의 진정한 확장이 아니라 결핍이 만들어낸 일시적인 팽창이었고, 더 높은 차원의 단단해짐이 아니라 나와 세계를 구분 짓던 마지막 경계의 비참한 희석이었다는 사실을. 타인의 숨결이 머물던 가장 연약했던 안쪽 살결에는 더 이상 황홀했던 착각의 흔적도, 영원할 것 같았던 합일의 잔향도 남아있지 않다. 대신 피부 바로 아래, 멈춰있던 혈관 위까지 스며드는 서늘한 외부의 공기가 나의 낯설고도 선명한 윤곽을 잔혹하게 드러낸다. 이 온도는 차갑지만 결코 잔혹하지는 않다. 다만 소름 끼치도록 맑다. 맑아서 나의 가난한 주체성을 더 이상 무엇으로도 숨길 수가 없다. 나는 누군가의 온기 속에서 잠시 흐려지고 지워졌던 연약한 존재였고, 그 거짓된 열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비로소 텅 빈 무기물로서의 또렷함을 되찾는다. 이것은 존재의 무너짐이 아니라, 숨겨져 있던 병적인 의존의 노출이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남아있기 위해 반드시 홀로 통과해야만 하는, 투명하고도 외로운 진공의 시간이다.
2. 홀로 마주한 공생적 합일의 끔찍한 민낯과 되찾은 무게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상태를 결코 참된 의미의 사랑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공생적 합일’이라는 가장 퇴행적이고 병적인 형태의 융합이라 불렀다. 프롬의 사유에 따르면,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 고유한 주체의 중심을 세우고 서로를 주체로서 존중하는 건강한 관계가 아니라, 분리라는 인간 근원의 고독을 견디지 못한 두 존재가 독립된 주체로 서는 대신 서로의 일부가 되어 병적으로 뒤엉키는 방식을 택한 것에 불과하다. 지독한 무력감 끝에 눈앞의 타인에게로 스며들어 안정을 얻으려는 비겁한 선택. 우리는 그 지독한 의존을 운명이라 믿었고, 그 맹목적인 종속을 영원이라 불렀으며, 서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그럴듯한 문장으로 우리의 병적인 결핍을 포장했다. 그러나 그 문장들은 사실 고독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가장 나약하고 간절한 방어 장치에 가까웠다. 나는 타인의 맹렬한 열에 기대어 나의 무거운 주체적 의무를 내려놓았고, 그 일시적인 편안함을 운명적인 사랑이라 뼈저리게 오인했다. 나를 지우는 대신 누군가의 일부가 되어 녹아내리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완전해 보였기 때문이다. 열이 사라지자 그 기만적이고 의존적이었던 구조가 비로소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타인을 잃은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맡겨 두었던, 혹은 타인을 통해 도피하려 했던 나라는 무거운 주체성을 비로소 되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서늘한 각성은 그래서 잔인하지 않다. 다만 정직하다. 이 온도는 감정을 부정하거나 나침반을 잃어버렸던 지난 시간의 열병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를 잠식하고 지워나가고 있었는지를 서늘하고도 천천히 보여준다. 사랑이라 믿었던 열이 나를 지탱하고 확장시킨 것이 아니라, 실은 나라는 주체의 성장을 잠시 보류시키고 유예시켰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뼈저리게 깨닫는다.
3. 건조한 일상의 지속성 앞에서 발견한 자율의 안착
열병이 떠난 일상은 의외로 경이로울 만큼 고요하다. 복도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있던 플라스틱 출입증은 더 이상 누군가의 체온을 기억하거나 나의 존재를 사회적 사물과 동기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질량에 따른 중력을 가진, 무심하고도 건조한 물질일 뿐이다. 꺼진 모니터 앞에 멈춰 있던 손등 위로 포개어졌던 타인의 따뜻한 손바닥 역시 흔적 없이 증발했고, 남은 것은 외부의 침입을 받아들였던 피부 고유의 건조하고 서늘한 감각뿐이다. 한때는 그 접촉과 파동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무기물의 침묵에서 깨어나게 하는 유일한 구원의 힘이라고 미친 듯이 믿었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외부에서 공급된 일시적이고 폭력적인 열이었고, 나의 중심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지속 가능한 에너지는 아니었다는 것을. 방 안의 공기는 타인의 숨결 없이도 예전처럼 고요하게 순환하고, 창밖의 빛은 어김없이 스며들며, 시계는 나의 해체나 융해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시간을 밀어낸다. 세계는 내가 누군가에게 녹아들었든 말든 상관없이, 그리고 내가 다시 서늘하게 굳었든 말든 상관없이 계속 돌아간다. 이 건조하고도 거대한 지속성 앞에서 나는 묘한 안도와 평화를 느끼게 된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속절없이 녹아내리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의 온도와 호흡에 나를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지 않아도 되는 상태. 정적은 처음엔 아찔한 공허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깊숙이 머물러 보면 그것은 치우침 없는 균열에 가깝다. 맹렬했던 열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차가움이 아니라, 나의 체온이 나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돌아오는 자율적인 과정이다. 나는 외부의 열에 반응하여 형태가 변하는 물질이 아니라, 스스로 온도를 만들어내고 주체적으로 열을 발생시키는 존재라는 사실을 조금씩, 그리고 묵묵히 받아들이게 된다.
4. 사랑의 폐허 위에 다시 세우는 주체의 선명한 경계
46도는 그래서 끝이 아니다. 이 온도는 사랑이라 오독했던 열병이 사라진 폐허의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주체적인 인식의 지점이다. 맹렬한 융해와 착각의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그리고 타인의 조각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나의 연약하고도 선명한 경계를 온전히 만져본다. 그것은 타인의 침입이 남긴 화상 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할퀴고 간 텅 비어있는 상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의 것이다. 타인의 열이 사라졌다고 해서 내가 완전히 식어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외부의 온도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독을 연료 삼아 서는 연습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서늘함은 지독한 고독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그 고독의 핵심에 자율과 자립이라는 굳건한 씨앗을 품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일부나 도구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고립된 채 스스로를 가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무너졌던 중심을 나의 안쪽으로 묵묵히 옮겨 놓았을 뿐이다. 외부의 열을 빼앗기 위해 맹렬하게 들러붙거나, 나의 체열을 빌려주기 위해 스스로를 녹일 필요가 없는 상태. 나의 체온이 오직 나를 지탱하고, 나의 숨결이 나를 움직이는 자족적인 상태. 46도는 격렬함이 식고 난 뒤의 투명하고도 맑은 온도다. 사랑이라는 숭고한 이름 아래 숨겨 두었던 끔찍한 종속의 구조를 백일하에 드러내고, 그 정직한 폐허 위에 다시 주체의 윤곽을 그리는 시간. 서늘하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주체적 각성의 구간이다. 이 투명한 온도에서 나는 처음으로 타인을 떠나 있는, 나라는 가난하지만 선명한 존재를 바라보고, 그 모습이 타인의 온기 없이는 결코 생존할 수 없을 것처럼 위태롭지는 않다는 사실을 천천히 인정하며, 이 서늘한 안착의 감각을 받아들인다.
서늘한 각성 46℃
이것은 맹렬했던 타인의 온기가 증발하고, 고립되었던 무기물이 다시 차가운 진공 상태에 도달하며 느끼는 아찔한 어지러움과 투명한 진실의 상태다. 즉,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공생적 합일의 끔찍한 민낯을 확인하며, 타인을 구원자로 오독했던 맹목적인 믿음의 허상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다. 타인의 온기로 가득 찼던 자리가 실은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끔찍한 종속과 착취의 전형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서늘하고도 막막한 각성의 시간.
이것은 맹렬했던 타인의 온기가 증발하고, 고립되었던 무기물이 다시 차가운 진공 상태에 도달하며 느끼는 아찔한 어지러움과 투명한 진실의 상태다. 즉, 에리히 프롬이 지적한 공생적 합일의 끔찍한 민낯을 확인하며, 타인을 구원자로 오독했던 맹목적인 믿음의 허상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다. 타인의 온기로 가득 찼던 자리가 실은 나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끔찍한 종속과 착취의 전형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서늘하고도 막막한 각성의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