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기록의 형벌]
이 글은 1910년 1월 17일, 대한제국의 심장부인 한성(서울)에서 벌어진 그 기이하고도 참담한 장면을 시작으로, ‘일진회(一進會)’라는 집단이 남긴 거대한 오욕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들의 죄상을 낱낱이 해부하여 그 이름 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찍는 ‘기록의 형벌(刑罰)’이다. 우리는 펜 끝을 칼처럼 갈아, 망각 속에 숨으려는 그들의 관 뚜껑을 다시 연다.
1. [장면의 복원] 창덕궁의 겨울바람과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청한 자들

1910년 1월 17일, 대한제국의 황궁인 창덕궁 돈화문 앞에는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보다 더 시린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국운이 경각에 달해 숨조차 쉬기 힘들던 그 시각, 일진회(一進會)라는 이름의 무리들이 황제 순종과 내각, 그리고 일본 통감부를 향해 문서를 들이밀었다. 그것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피지배국 국민이 자신의 군주에게 나라를 팔아넘길 것을 독촉하는 **‘합방 청원서’**였다. 그들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비장함은 나라를 구하려는 충정이 아니라, 강대국 일본의 품에 안겨 권력의 부스러기라도 챙기려는 사냥개들의 탐욕스러운 조바심이었다. 그들은 문서에 이렇게 적었다. “폐하, 대한제국은 이미 빈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일어설 수 없으니, 일본 천황에게 통치권을 위임하고 우리는 그 신민(臣民)이 되어 보호를 받는 것이 백성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것은 충언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외부의 적이 칼을 들고 들어오기도 전에, 내부의 자식들이 먼저 대문을 열고 “제발 우리를 노예로 삼아달라”고 울부짖은 1월 17일의 광경. 이것은 한국 근대사가 마주한 가장 수치스럽고도 기이한, 집단적 광기의 서막이었다.
2. [논리의 해부] ‘대아시아주의’라는 가면 뒤에 숨은 패배주의의 극치

일진회가 내세운 논리는 치밀하고도 교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매국 행위를 단순한 배신이 아닌, ‘시대적 결단’이자 ‘진보(進步)’라고 포장했다. 그들이 차용한 것은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선전하던 대아시아주의(Pan-Asianism)였다.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서는 황인종이 단결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가장 강력한 일본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일진회는 이 논리를 비틀어 “조선이 일본과 합쳐지는 것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제국의 일원이 되어 승승장구하는 길”이라고 민중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수사학의 이면에는 철저한 ‘패배주의’와 ‘노예근성’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는 스스로 개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주권국가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모든 저항을 ‘무의미한 소모’로 규정했다. 강간범에게 저항하는 것을 ‘어리석은 반항’이라 비웃고, 차라리 순순히 굴복하여 목숨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현명한 처세’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들이 청원한 합방은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영혼의 거세(去勢)였다.
3. [행동의 실체] 가위를 든 테러리스트, 문명의 탈을 쓴 야만

자신들을 ‘선각자’라 칭했던 일진회의 행동 양식은 전근대적인 폭력 조직, 즉 깡패 집단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은 10만 명에 달한다는 회원 수를 무기로 삼아 한성 거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상징은 ‘가위’였다. “문명개화를 위해서는 구습을 타파해야 한다”는 핑계로, 길 가는 힘없는 노인들을 포위하여 강제로 상투를 잘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머리카락이 잘린 노인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할 때, 일진회원들은 그 잘린 상투를 전리품처럼 흔들며 조롱했다. 이것은 계몽 운동이 아니었다. 타인의 신체를 훼손하고 모욕감을 줌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가학적인 ‘백색 테러’였다. 지방에서의 행패는 더욱 악랄했다. 그들은 군수와 지역 유지들을 찾아가 “일진회 운영 자금을 내라”고 협박했고, 이에 불응하면 “비적(의병)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일본 헌병대에 넘겼다. 남의 집 문서를 뺏고, 부녀자를 희롱하며,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의병 토벌에 앞장섰던 그들. 오늘날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강약약강)’ 비겁한 인간 군상의 원형(Archetype)이 바로 100년 전 그들이었다.
4. [추악한 암투] 1910년 1월, 매국노들의 밥그릇 쟁탈전

1910년 1월 17일을 전후하여 물밑에서는 구역질 나는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일진회(송병준, 이용구)와 당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의 ‘매국 주도권 다툼’이었다. 일진회 측은 “우리가 100만 회원을 동원해 합방 여론을 조성했으니, 새 정부의 권력은 우리 몫이다”라고 주장하며 조바심을 냈다. 반면, 이완용은 “일개 폭력 단체 따위가 국가 대사에 낄 자리가 아니다. 나라를 팔아도 도장은 내가 찍는다”며 그들을 견제했다. 국가의 운명이 벼랑 끝에 몰린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 두 세력은 “누가 나라를 구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 아니라 “누가 나라를 판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와 포상금을 독식할 것인가”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일진회가 1월 17일에 그토록 집요하게 합방 청원서를 들이밀었던 진짜 이유는, 이완용에게 ‘매국의 공(功)’을 빼앗길까 두려웠던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것은 정치 투쟁이 아니라, 장물(나라)을 두고 다투는 도적 떼의 내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5. [일본의 시선] 짖을 때만 필요했던 ‘일회용 사냥개’

일진회는 자신들이 일본의 진정한 파트너이자 동지라고 착각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냉혹한 계산 속에서 그들은 그저 쓰고 '버릴 사냥개’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 통감부(소네 아라스케 통감)는 일진회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일진회가 더 크게 짖고 날뛸수록 한국 사회는 분열되었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저항할 의지를 상실해갔다. 일본은 이 혼란을 즐겼다. 그러나 일본은 일진회를 통치 파트너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식하고 통제되지 않는 폭력 집단이 권력을 잡으면 식민지 경영에 방해가 될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일진회를 이용해 ‘합방 여론’이라는 무대를 만든 뒤, 막상 조약을 체결할 때는 행정 관료 출신인 이완용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일진회는 일본을 ‘형님’이라 불렀지만, 일본에게 그들은 사냥이 끝나면 솥에 들어가야 할 사냥감일 뿐이었다. 이 비극적이고도 멍청한 착각이 그들의 파멸을 예고하고 있었다.
6. [최후의 심판 1] 송병준과 이용구, 엇갈린 죽음 속 동일한 죄

1910년 8월, 기어이 나라가 넘어가자 두 우두머리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성공한 악마’ 송병준은 일본의 의도대로 얌전히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나는 대가로 일본 귀족(백작)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챙겼다. 그는 나라를 판 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다 1925년 뇌일혈로 쓰러질 때까지 천수를 누렸다. 반면, 행동대장 노릇을 했던 이용구의 말로는 비참했다. 합방 직후인 9월, 일본은 일진회를 “위험한 집단”으로 규정해 강제 해산 명령을 내렸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한 이용구는 “일본에 속았다”며 울분을 토하다가 1912년, 홧병과 폐병으로 객사했다. 누군가는 호의호식하다 죽었고, 누군가는 비참하게 죽었다. 그러나 역사의 법정에서 이 둘의 형량은 다르지 않다. 송병준의 안락한 죽음은 ‘현실의 부조리’를 증명하는 증거로, 이용구의 비참한 죽음은 ‘배신자의 말로’를 증명하는 증거로 남았을 뿐이다. 그들은 둘 다 영혼을 팔아치운 ‘국가 사기단’의 괴수(魁首)들이었다.
7. [최후의 심판 2] 1월 17일, 기록으로 집행하는 영원한 부관참시

오늘 1월 17일, 우리는 먼지를 털어내고 이 불쾌한 기록을 다시 꺼내 읽는다. 혹자는 묻는다. 이미 100년도 더 된 일을, 흙으로 돌아간 자들의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느냐고. 그러나 바로 그 망각(忘却)’이야말로 일진회와 같은 변절자들이 무덤 속에서 가장 바라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고 변명하며, 후대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기를, 그리하여 면죄부를 얻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감정을 배제하고 더욱 차갑고 집요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들이 가위로 자른 것이 단순한 머리카락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이었음을, 그들이 팔아넘긴 것이 땅덩어리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였음을 활자화하여 남겨야 한다. 펜으로 그들의 관 뚜껑을 다시 열고, 그 이마에 '반민족행위자'라는 낙인을 깊게 새기는 작업. 이것이 살아남은 우리가 1월 17일에 행하는 가장 우아하고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복수다. 기억하는 한, 그들의 죄는 사해지지 않는다.
'오늘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월 22일(1943년), 단두대 위의 정언명령: 백장미가 증명한 인간의 실존 (0) | 2026.02.22 |
|---|---|
| 2월 21일(1848년), 유령이 깨운 괴물: 선언문이 남긴 설계도와 낙인 (0) | 2026.02.21 |
| 1월 16일(2008년), 콘크리트가 미래를 묻어버린 날 (0) | 2026.01.17 |
| 1월 16일(1605), 돈 키호테의 탄생을 기리며 (1) | 2026.01.16 |
| 1월 15일(1982년), OB 베어스의 창단... 그리고 (3) | 2026.0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