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같은 날짜, 다른 법정 – 1996년 12월 16일을 다시 떠올리면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형사법정은 한국 현대사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만들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을 지휘했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신군부 핵심 인사들에게 항소심 선고가 내려진 날이었다. 법정은 단순히 개인의 범죄 여부만을 따지는 자리가 아니라, “국가란 무엇이고, 군대와 권력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를 되묻는 공간이 되었다.
그날의 선고문에서 법원은 12·12를 군사반란, 5·18 당시의 계엄 확대와 유혈 진압을 내란에 준하는 헌정 질서 파괴 행위로 규정하며, 군과 권력이 헌법 위에 설 수 없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후 대법원이 1997년 최종적으로 이 판단을 확정하면서, 12·12와 5·18은 역사적 평가를 넘어 법적으로도 ‘반란’과 ‘학살’의 이름을 부여받게 된다. YouTube+1

2. 오랜 침묵 끝에 열린 재판 – “과거는 끝났지만 책임은 남아 있다”
사실 이 재판이 열리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1980년대 내내 군사정권이 이어졌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시작된 뒤에도 신군부 핵심들은 한동안 “역사의 심판 앞에 서 있다”는 말만 반복할 뿐, 실제 법정에 서지는 않았다. 5·18 피해자와 유족들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 왔지만, 정치적 공방과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자”는 논리가 그 요구 앞에 벽처럼 버티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5·18 특별법 제정과 함께 기소가 이뤄지면서 비로소 역사는 법정으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이미 옛일”이라는 냉소도,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능사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곧 논쟁의 초점은 바뀌었다. 문제는 개인적 호불호가 아니라, 군이 탱크와 총으로 권력을 빼앗는 일을 허용할 것인가, 그리고 민주주의를 피로 짓밟은 행위에 ‘시효’가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3. 항소심이 붙인 이름들 – ‘군사반란’과 ‘내란’이라는 법적 언어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 재판부는 1심의 유죄 판단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형량을 일부 조정했다. 전두환에게 선고된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노태우에게 내려졌던 징역 22년 6개월은 징역 17년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형량의 숫자 자체가 아니라, 판결문이 남긴 문장들이었다. 법원은 12·12를 “정규 지휘 계통을 무력으로 붕괴시키고 군권을 탈취한 군사반란”으로, 5·18 전후의 계엄 확대와 광주 유혈 진압을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침해하여 헌정 질서를 파괴한 내란적 행위”로 명시했다. YouTube+1
이때부터 12·12와 5·18은 더 이상 “공방이 엇갈리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사법부 판결에 의해 헌정 질서를 파괴한 범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국 사회는 그제야 “쿠데타”를 법률 용어인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특별사면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논쟁이 이어졌다. 반란과 학살의 책임을 묻는 일과, 정치적 화해를 위해 사면을 단행하는 일 사이의 간극이 현실 정치에서 날 것으로 드러난 것이다.

4. 특별사면 이후, 다시 돌아온 질문 – “법의 이름으로 단죄했다면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1997년 말,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연말 특별사면이 전격 단행되면서, 12·12와 5·18 책임자들은 다시 감옥 밖으로 나왔다. 사면의 명분은 “국민 통합”과 “미래 지향”이었다. 그 결정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한국 사회는 법정에서는 군사반란과 내란의 책임을 묻고, 정치 무대에서는 그 책임자들을 다시 풀어주는 모순된 선택을 동시에 경험했다는 점이다.
그 뒤로도 수차례의 진상 규명과 추가 조사, 명예 회복 작업이 이어졌지만, “쿠데타 세력에 대한 단죄는 충분했는가”라는 질문은 지금까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 선고가 남긴 문장들은, 사면 이후에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읽히고 인용되었다. 판결문은 이미 내려졌지만, 그 판결이 사회 전체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실천될지는 여전히 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5. 12·3 비상계엄과 오늘의 재판 – 또 한 번 법정으로 올라온 ‘반헌법적 행위’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한 번 **“헌정 질서를 뒤흔든 행위”**를 법정에서 다투는 장면을 보고 있다. 2024년 12월 3일 밤 비상계엄 선포와 그 전후 준비 과정에 대해, 국회와 특검, 법원이 각각의 자리에서 진실을 가려 보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당신이 앞선 글들에서 정리했던 것처럼, 윤석열 전 대통령과 군·정부·정보기관 관련자들은 내란과 외환, 직권남용 등 혐의로 수사와 재판을 받고 있다. 아직 유죄도, 무죄도 확정되지 않았고, 법원은 긴 공판을 통해 각자의 주장과 증거를 듣고 있다.
법정 풍경은 1990년대와 많이 달라졌지만, 근본 질문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군과 검찰, 정보기관, 대통령이 헌법이 정한 절차를 뛰어넘어 권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려 할 때, 그것을 어디까지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고, 어디서부터 “헌정 질서 파괴”로 보아야 하는가. 1996년 12월 16일 항소심 선고는, 적어도 한 번은 한국 사회가 이 질문에 대해 “총과 탱크로 권력을 빼앗는 것은 군사반란이며,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는 것은 내란”이라는 답을 내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오늘 진행 중인 재판이 어떤 결론에 이르든, 우리는 다시 그 시점에 서 있다. 반헌법적 행위를 법의 언어로 어떻게 부를 것인가, 그리고 그 책임을 어디까지 물을 것인가. 1996년 12월 16일과 2024년 12월 3일, 그리고 2025년의 법정은 서로 연결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내리느냐에 따라, “다시는 군사반란과 내란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빈말이 될지, 아니면 헌법의 실질적 다짐이 될지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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