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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12월 3일(2024년), 계엄이 시도된 나라에서 다시 계엄을 상상하다


1. 12·3 이후의 한국, 왜 우리는 또 한 번 ‘계엄’을 상상해야 하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7분, 윤석열 대통령은 긴급 대국민 담화를 열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헌법이 정한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가 아님에도, 그는 “종북 반국가 세력을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말을 앞세웠다.

그날 밤, 계엄 포고령 1호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다.
국회와 지방의회 활동을 포함한 모든 정치 활동 금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정지. 대한민국 국민이 헌법에서 배운 자유와 권리는, 단 몇 줄 문장으로 한꺼번에 ‘중지’ 버튼이 눌렸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계엄군이 들어가려 했던 그 밤, 국회는 말 그대로 시간과의 싸움을 했다. “계엄군이 먼저 국회를 점령하느냐, 국회가 먼저 계엄 해제안을 의결하느냐”의 속도전이었다.  국회 직원과 보좌진, 경위들은 계단과 출입문에 책상과 의자를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계단을 밀고 올라오는 군 병력 앞에 소화기를 뿌리며 버텼다. “지켜라 국회를, 막아라 계엄을”이라는 외침이, 그날 국회의 밤을 버텨낸 문장으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6시간 만에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새벽 4시 30분 윤석열은 계엄 해제를 담화로 발표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헌법재판소는 그를 파면했다. 결정문은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능 행사를 방해할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한 점을 중대 위헌행위로 규정하며, 대통령이 ‘국민의 신임을 중대하게 저버렸다’고 적시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아주 이상한 시간 위에 서 있다.
한편으로는 “계엄은 6시간짜리 해프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 총성이 울리지 않았고, 탱크가 도심 한복판까지 들어오지 않았고, 대규모 체포 작전이 완전히 발동되기 전에 막혔으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날을 “12·3 내란”이라고 사람들은 부른다. 대통령이 군을 동원해 국회와 중앙선관위를 장악하려 했고, 계엄 해제 결의안 가결 후에도 2차·3차 계엄 시도를 지시했다는 군 장교들의 진술이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두 문장 사이에 멈춰 서서 가만히 질문하는 것이다.

> “만약 12월 3일 밤, 국회가 계엄 해제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면?”
“만약 계엄군이 국회를 조금 더 빨리 점령했다면?”

이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여 보는 상상은 단순한 공상이 아니다.
이미 이 나라는, 계엄과 쿠데타가 실제로 ‘성공’했던 시간을 여러 번 경험한 나라다. 그때의 구체적인 폭력과 죽음, 그리고 이름을 가진 얼굴들을 떠올려야, 12·3이 얼마나 위험한 선을 넘었던 밤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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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 현대사의 계엄, 이름이 사라진 밤들의 연속

2-1. 5·16의 새벽 ― 라디오와 탱크의 첫 등장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로 들어온 군 트럭과 탱크는 방송국과 요충지를 점령했다. “군사혁명위원회”라는 생경한 이름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아침을 맞기도 전에 ‘계엄령’이라는 단어와 함께 새로운 정권이 서 있었다. 국회는 사실상 무력화됐고,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학생들이 “정치활동 금지자” 목록에 올랐다.


그때부터 이 나라에서 계엄은, “총을 든 행정부”, **“법 위에 선 군대”**를 뜻하는 익숙한 단어가 되어 갔다.

2-2. 유신과 긴급조치 ― 헌법 위에 선 대통령, 그 위에 선 정보기관

1972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는 이름만 다를 뿐 사실상 ‘상시 계엄’에 가까웠다. 긴급조치가 발동되면 헌법 위에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올라앉았고, 중앙정보부와 보안부대는 언제든 ‘치안’과 ‘안보’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데려갈 수 있었다.


대학가에서는 새벽마다 정보기관 차량이 들이닥쳤다. 기숙사 복도에 울리는 군화 발자국, 자고 있던 학생이 이불째 질질 끌려나가는 소리, 복도 끝에서 울부짖는 친구의 목소리. 남영동 대공분실, 서빙고 보안사, 각 지역 보안대의 지하실은 사람들의 몸에서 ‘자백’을 뽑아내는 공장처럼 돌아갔다.

2-3. 5·17, 5·18 ― 전국 확대 계엄과 광주의 함성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에 이어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선포했다. 정당과 국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원천 봉쇄했다. 그 직후 광주에서는 시민들이 계엄군에 맞서 들고 일어났다.


공수부대가 투입된 광주의 골목골목에서는, 사람의 몸이 곤봉에 부서지는 소리와 총성이 섞였다. 트럭과 쓰레기차에 실려 나간 시신들. 누가 누구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집단 매장된 시신들. 집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평생 ‘행방불명자’로 부르며 살아야 했던 가족들.

계엄은 늘 같은 순서로 움직였다.

1. 언론 통제 – 진실이 ‘발표되지 않는 것’이 된다.
2. 체포와 연행 – 지도층을 먼저 끊어낸다.
3. 통행과 집회 제한 – 광장을 텅 비게 만든다.
4. 고문과 조작 – 법과 재판을 폭력의 도구로 바꾼다.



그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든, 이름 대신 숫자로 불렸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것이 한국 현대사에서 ‘계엄’이란 단어가 남긴 첫 번째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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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2·3이 만약 ‘성공한 계엄’이 되었더라면 – 첫 48시간의 상상

이제 2024년 12월 3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번에는, 그날 밤 국회가 계엄 해제안을 통과시키지 못했고, 계엄군이 국회와 중앙선관위를 완전히 장악했다는 가정 위에서 시작해 본다.

3-1. 텔레비전 화면 속의 단어들

밤 10시 27분. 대통령의 얼굴이 화면에 잡힌다. 단정한 정장, 단호한 표정, 뒤에는 태극기와 국군 깃발. 그는 야당과 시민단체를 ‘종북 세력’, ‘반국가 세력’이라고 지칭하며 말을 이어가다, 문장을 끊는다.

> “지금 이 시간부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화면 하단에는 굵은 글씨로 자막이 깔린다.

[속보] 대통령, 전국 비상계엄 선포

[포고령 1호] 국회·지방의회 활동 포함 모든 정치활동 금지

언론 및 출판 자유 정지, 허위·가짜뉴스 유포 시 군사재판 회부

다음 프로그램은 취소되고, 계엄사령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평소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사라지고, “질서 유지”, “국가안보”, “종북 세력 척결”이라는 단어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3-2. 국회, 그리고 닫힌 문

현실의 시간에서는, 국회가 계엄 해제안을 통과시키고 계엄군의 진입 시도를 몸으로 막아냈다.

하지만 만약, 그 속도전에서 국회가 졌다면?

국회 본회의장은 문이 열리기도 전에 계엄군에 의해 봉쇄됐을 것이다. 출입구마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서 있고, 본청으로 들어가는 계단마다 방패가 벽을 이루고, 국회 경위와 보좌진이 바리케이드를 치기도 전에 제압당했을 것이다.


폐쇄된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은 아예 상정조차 되지 못한 채 며칠, 몇 주를 버텼을지 모른다.

3-3. ‘우선 체포 대상자’ 목록이 열리는 밤

대통령과 일부 군·정보기관 수뇌부의 책상 서랍에는 이미 ‘우선 체포 대상자’ 목록이 있었다고 상상해 보자. 국회의원, 야당 지도부, 헌법학자와 변호사들, 비판적 언론인, 시민단체 활동가, 파업을 이끌어본 노조 간부, 그리고 SNS에서 영향력이 큰 인플루언서들까지.


계엄이 ‘성공’한 시나리오에서는, 12월 4일 새벽이 되기도 전에 이 사람들의 휴대폰은 전원이 꺼져 버렸을 것이다.
새벽 3시, 현관 초인종이 울리고, 위장복을 입은 군인들과 사복을 입은 수사관들이 문틈으로 신분증을 비춘다.

> “계엄사령부 지시로 영장 없이 긴급 연행하겠습니다.”

집 안의 모든 눈이 같은 곳을 향한다.
누군가는 구두를 신을 틈도 없이 슬리퍼 채로 끌려 나간다.

인터폰 카메라에는 검은 군용 차량 번호판 하나가 찍힌다. 집 안에 남은 가족들은, 그 번호판이 평생 잊히지 않는 이미지가 된다.

3-4. 스마트폰이 ‘위험물’이 되는 사회

옛날 계엄 하에서는 책과 유인물이 ‘위험물’이었다면, 2020년대의 계엄에서는 스마트폰과 메신저가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단체 채팅방의 이름, 나눈 대화, 리트윗과 좋아요, 게시물 공유 흔적들.
계엄사령부의 디지털 수사팀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이용해, “정권 비판 성향”, **“계엄 반대 여론”**을 지도 위에 점처럼 찍어 나간다.

특정 키워드를 자주 쓰는 계정들의 위치

비슷한 링크를 공유한 사람들의 네트워크

계엄 반대 집회 공지글을 퍼 나른 사람들의 리스트


이 모든 데이터가, 예전의 정보기관이 만들던 ‘블랙리스트’보다 훨씬 정교한 사냥 지도가 된다.

“내가 예전에 눌렀던 좋아요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갑자기 3년, 5년 전의 댓글과 리트윗을 떠올리며, 핸드폰을 손에 쥔 채 잠이 오지 않는 밤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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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잔인함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 계엄과 독재가 남긴 몸의 기억들

추상적인 말만으로는 계엄의 위험이 잘 와닿지 않는다.
교과서에 적힌 “인권 탄압”, “국가폭력”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무엇이 얼마나 부서졌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실명과 몸의 기억을 함께 떠올려야 한다.

4-1.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 열다섯 살 중학생 김주열은 형과 함께 거리에 나갔다. 그날 이후 그는 실종됐고, 27일 뒤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올랐다. 오른쪽 눈에서 뒤통수까지, 알루미늄제 최루탄 하나가 그대로 박힌 상태였다. 시위 진압에 사용된 최루탄이, 한 소년의 눈과 두개골을 관통한 것이다.


경찰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그의 시신을 몰래 차에 실어 바다에 유기했다.
바닷물에 떠오른 시신의 얼굴은 부패로 부풀어 있었고, 눈에 박힌 최루탄은 여전히 빠지지 않은 채였다. 기자 허종의 기사와 사진이 세상에 나오자, 사람들은 “이 아이가 왜 눈에 최루탄을 박은 채 죽어 있어야 했는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 분노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계엄과 독재는, 이렇게 한 사람의 얼굴을 통째로 망가뜨린 뒤에야 비로소 저지당하곤 했다.

4-2.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 남영동의 박종철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졌다. 경찰은 그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 폭행을 가했다.

다음날, 치안본부장은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책상 소리와 감탄사 한 줄로 덮어버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검의의 증언과 언론 보도를 통해, 그의 몸에 남은 물고문 흔적과 전기고문 자국이 드러났다. 젖은 담요를 씌우고 물을 붓고, 코와 입을 틀어막아 기도가 막히게 만드는 방식, 몸 곳곳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방식, 엎드려뻗쳐를 시킨 뒤 온몸을 때리는 방식. 그 모든 것이 “조사 기법”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있었다.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은 지금 ‘인권보호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있다. 하지만 509호 조사실은 그대로 남아 있다. 좁은 방, 고문 의자, 벽에 박힌 고리, 수도꼭지와 배수구. 그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부서졌는지, 공간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

4-3. 이한열의 후두부를 꿰뚫은 최루탄

그해 여름, 또 한 명의 대학생이 거리에서 쓰러졌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린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이후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 하나가 학생 이한열의 뒷머리를 직격했다. 그는 두개골이 함몰된 채 쓰러져 한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숨졌다.


그의 병상 사진,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눈을 감고 있는 얼굴 위로 붕대를 감은 모습, 그 옆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곧 6월 민주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최루탄은 군중을 ‘해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를 갈라놓는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몸이 보여줬다.

4-4.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 전태일의 몸에 붙은 불꽃

계엄과 군사독재의 시대는 거리의 시위대뿐 아니라, 공장 안의 노동자들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그는 오랫동안 노동청과 정부, 언론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호소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결국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를 향해 마지막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의 몸은 전신 3도 화상으로 까맣게 타들어 갔고, 병원에서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그날 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내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고 버티며,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관철시켰다.


전태일의 분신은 “계엄”이라는 단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국가가 경제 성장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의 몸을 어떻게 갈아 넣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잔혹한 상징이다. 계엄과 독재가 합쳐졌을 때, 공장과 거리와 취조실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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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2·3의 밤을 다시 본다 – ‘성공한 쿠데타’ 이후의 한국을 그려 보는 것

5-1. 헌법이 뜯겨 나가는 순서


만약 12·3 계엄이 국회의 해제 결의 없이 지속되었다면, 그리고 윤석열이 2차·3차 계엄 시도를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면, 헌법은 어떤 순서로 뜯겨 나갔을까.

1. 국회의 기능 마비

계엄 포고령에 따라 국회 본회의는 소집이 제한된다.

야당 의원 일부는 “국헌문란 혐의”로 군사법정에 회부된다.

여당 내 비판 세력도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검찰 수사 혹은 탈당 압박을 받는다.



2. 사법부의 순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대한 인사·예산 압박이 강화된다.

계엄령과 관련된 위헌 심판은 ‘국가안보 고려’라는 이유로 각하 또는 기각된다.

군사법원의 권한이 확대되면서, 민간인이 군사재판을 받는 사례가 늘어난다.



3. 언론 구조조정과 자기검열

비판적인 방송사는 ‘경영 악화’나 ‘허위보도’ 등을 이유로 압수수색과 세무조사를 당하고, 일부는 대기업에 인수·합병된다.

편집국장·앵커·논설위원이 교체되고, 탐사보도 프로그램은 폐지된다.

기자들은 “‘계엄 반대’ 프레임으로 보도할 경우, 허위 선동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내부 지침을 받는다.




4. 시민사회와 대학의 침묵

인권·여성·환경·노동·성소수자 단체는 “이념 편향”을 이유로 보조금 지원이 끊기거나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당한다.

대학 학생회는 사실상 해산되고, 정치적 토론 동아리는 허가를 받지 못한다.

장학금과 취업, 병역 혜택 등이 ‘계엄에 대한 충성도’를 평가하는 간접 지표로 변질된다.



5. 일상의 변형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아예 하지 않거나, ‘주식·집값·취업’ 이야기만 나눈다.

카카오톡 단체방 이름을 바꾸고, 예전 메시지를 지우는 것이 일상적인 습관이 된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정권 비판을 시작하면, 옆자리 사람들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주변을 먼저 둘러본다.


계엄은 결국 사람들의 혀와 손가락, 표정과 눈빛까지 바꾸는 시스템이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다”는 말이, 단순한 무관심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 되는 사회. 그런 사회가, 12·3 이후 우리의 현재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5-2. 국제 뉴스 속의 한국 – 다시 시험대에 오른 민주주의

실제 현실에서도, 6시간짜리 계엄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동맹 관계를 시험대에 올렸다. 미국 백악관 NSC는 한국 정부로부터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밝혔고, 외신들은 윤석열의 계엄령을 트럼프의 ‘대선 결과 전복 시도’와 비교하며 우려를 표했다.

만약 계엄이 장기화되었다면, 한국은 더 이상 “성공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선거로 뽑힌 지도자가 군대를 이용해 헌법을 뒤집으려 한 나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과거 우리에게 연대를 보내주던 세계의 인권·민주주의 운동이 한국을 돕기 위해 다시 캠페인을 조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 내부에서는 “외세의 내정 간섭”이라는 프레임이 강화되며 또 다른 갈등과 혐오가 조장됐을 수도 있다.


계엄은 국내 정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지키는가, 혹은 어떻게 배신하는가는, 그 나라가 세계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릴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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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름과 얼굴을 되살리는 일 – 교과서 바깥의 민주화 운동

우리가 계엄을 상상할 때 함께 떠올려야 할 얼굴들은, 단지 김주열·박종철·이한열·전태일만이 아니다.

광주 도청을 지키다 마지막까지 방송을 이어갔던 윤상원과 시민군들

옥중 단식 투쟁 끝에 숨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남영동과 여러 구치소에서 지속적으로 고문을 당했던 정치인·운동가 김근태

부마항쟁, 6월 항쟁, 노동·농민·빈민 운동 현장에서 곤봉에 맞고 구둣발에 짓밟히며도 물러서지 않았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그들의 공통점은, “언젠가 민주주의가 올 거라는 확신”이 아니라,
“이대로 살 수 없다는 감각” 하나로 거리와 골목, 공장과 교회, 대학과 성당으로 나섰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김주열은 시위를 나가면서 혁명가가 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부정선거에 분노한 열다섯 살짜리 학생이었다.

박종철은 조사실에 끌려가면서, 자신이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친구의 소재를 불어야 하느냐, 버텨야 하느냐 사이에서 버티다가 목숨을 잃은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이한열은 그날 시위가 끝난 뒤 친구들과 함께 맥주 한 잔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최루탄 하나가, 그 평범한 상상을 뇌를 꿰뚫고 지나갔다.

전태일은 자신이 불붙은 몸으로 달려가며 외쳤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말이, 수십 년 뒤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슬로건이 될 줄 몰랐다. 그는 그저 눈앞의 여공들이 숨이 막히는 다락방에서 쓰러져가는 모습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청년이었다.


이처럼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은, 대단한 영웅이라기보다, 너무 구체적인 고통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한 사람들에 더 가깝다. 계엄과 쿠데타를 상상할 때,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함께 되살아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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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시는 같은 이름을 묘비에 새기지 않기 위해 – 12·3 이후 우리가 할 일

우리는, 다행히도 ‘성공한 계엄’이 아니라 “시도되었다가 막힌 계엄”을 살아남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지킨 경위와 보좌진, 계엄군에게 소화기를 뿌리며 문을 닫아 걸었던 국회 직원들, 계엄 해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190명의 의원들, 그리고 그날 밤 “국회로 모이자”고 외치며 거리로 나왔던 시민들 덕분이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전 대통령을 파면하며, 계엄 선포가 “헌법기관인 국회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봉쇄하려는 시도”였다고 판시했다.
이는 단지 한 정치인의 몰락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 어느 정권이든 계엄과 군사력을 정치적 도구로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 선례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1. 계엄과 쿠데타의 구체적인 폭력을 잊지 않는 것

‘국가폭력’이라는 추상적 말 대신, 김주열의 눈에 박힌 최루탄, 박종철의 물고문 흔적, 이한열의 후두부를 꿰뚫은 최루탄, 전태일의 불붙은 몸을 떠올리는 것.

교과서의 연표가 아니라, 몸과 얼굴, 이름과 가족의 눈물을 기억하는 것.



2. 헌법과 제도를 더 촘촘하게 고치는 것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더 엄격히 제한하고, 국회의 해제 요구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장치를 마련하는 것.

군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화하고, 계엄 하에서도 인권이 보호될 수 있도록 국제 기준에 맞는 법과 제도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것.



3. ‘안보’와 ‘질서’라는 말을 의심하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

누군가가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며 시민의 자유를 줄이자고 할 때, “정말 그 자유를 빼앗아야만 안보가 지켜지는가?”를 묻는 것.

“종북”, “반국가 세력” 같은 낡은 낙인 전략이 다시 사용될 때, 그 말 뒤에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입을 막히는지 따져 묻는 것.




4. 거리와 언어, 기록을 버리지 않는 것

필요할 때는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 준비를 잃지 않는 것.

기사와 책, 다큐멘터리와 소설, 블로그와 댓글로 12·3을 기록하고 토론하는 것.

“정치 이야기 하지 말자”는 말보다, “그래도 이 정도는 이야기해야지”라는 문장을 서로에게 건네는 것.




우리가 계엄과 쿠데타에 대해 상상하는 이유는, 그 일이 언제든 다시 시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12·3은 그 가능성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보여줬고, 동시에 그 시도를 막아낸 사람들이 아직 이 나라에 있다는 것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이 약속 하나만은 분명히 할 수 있다.

>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죽어 갔다.
그러니 우리는,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옆에, 똑같은 이유로 새로운 이름이 추가되는 것을 다시는 허용하지 않겠다고 말해야 한다.



계엄과 쿠데타가 다시 입 밖에 나오는 순간마다, 우리는 그 단어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답해야 한다.

> “아니오.”
그리고, “우리는 이미 한 번 그 길을 걸어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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