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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9월 22일 ― 국회에 던져진 오물, 그리고 오늘의 적반하장


1966년 9월 22일, 김두한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인분을 던진 사건은 “재벌 밀수”를 둘러싼 분노가 제도 밖의 폭력으로 치환된 순간이었다. 반세기 뒤, 장외투쟁과 책임 회피로 반복되는 정치의 습관은 그날의 교훈—국민 앞에서 토론과 책임으로 문제를 해결하라—을 여전히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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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은 질문이 아니라 오물로 종결됐다. 삼성 계열 한국비료의 사카린 원료 밀수 문제를 따지는 대정부 질문 도중, 무소속 김두한 의원은 준비해온 인분을 국무위원석을 향해 투척했다. 그 표적에는 당시 정일권 국무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 각료들이 있었다. 회의록에는 “똥이나 처먹어”라는 폭언, 소란, 산회 선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정치의 언어가 논박과 설득에서 혐오와 조롱으로 뒤집힌, 한국 의회사의 치욕이었다.


사건의 뇌관은 여론을 달군 **‘특정 재벌 밀수’**였다. 9월 15일 경향신문 보도로 불붙은 사카린 밀수 의혹은 “벌금·추징으로 덮인 뒤 뒤늦게 드러난 특혜”라는 공분을 낳았고, 국회는 이틀 연속 대정부 질문을 이어갔다. 김두한은 전날 밤 자택 화장실에서 직접 인분을 퍼 담았다는 비서 증언까지 남겼다. 몰아붙일 근거와 분노는 충분했지만, 택한 방식은 제도의 품격을 무너뜨렸다.


그날의 오물은 단지 사람에게 던져지지 않았다. 국회라는 제도의 권위에, 그리고 국민이 부여한 대표성에 던져졌다. 재벌·권력 유착 의혹을 따지는 일은 의회의 책무였지만, 의회가 스스로 절차와 토론을 포기하는 순간, 정의의 언어는 곧바로 폭력의 제스처로 변질됐다. 사건 직후 김두한은 구속됐고(9월 24일 밤 보도), 국회는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더러워진 것은 본회의장 바닥만이 아니었다. 정치에 대한 국민 신뢰였다.


그렇다고 당시의 분노가 근거 없었다는 말은 아니다.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정국은 요동쳤고, ‘경제 개발’을 앞세운 정부의 처리 방식은 “굴욕·면죄부” 논란을 낳았다. 재벌 밀수 의혹이 맞물리며 “정치가 강자의 비리를 감싸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쌓였다. 다만, 정당한 분노가 정당한 절차를 떠나는 순간, 정치는 제 스스로 명분을 잃는다—그것이 9월 22일이 남긴 첫 번째 교훈이었다.


반세기 뒤 오늘,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민의힘은 중대한 쟁점 국면마다 국회 안 책임 있는 토론보다 장외투쟁을 우선하고, 각종 의혹·논란 앞에서도 성찰보다 공세로 맞서는 장면이 되풀이된다. 심지어 헌정질서를 뒤흔드는 사안들에 대한 동조·방조 논란이 제기되는 국면에서도, “우리가 피해자”라는 프레임으로 밀어붙이는 태도는 정치적 폭력의 방식만 바뀌었을 뿐 본질은 닮아 있다. 1966년의 오물이 본회의장을 더럽혔다면, 오늘의 장외정치는 민주주의의 신뢰를 더럽힌다. (주: 이 문단은 오늘의 정치 행태에 대한 비평이며, 형사상 사실판단이 아니라 공적 행위에 대한 정치적 의견임을 밝힙니다.)

정치가 대결의 무대가 아니라 공론의 장이라면, 민주주의의 힘은 장외 구호가 아니라 장내 책임에서 나온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의혹에는 설명으로, 정책에는 논거로, 충돌에는 타협으로 응답할 때만, 국회는 다시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 1966년의 오물투척이 던진 두 번째 교훈은 분명하다. 분노는 이유가 될 수 있으나, 폭력은 언제나 변명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질문은 여기로 돌아온다. 정치는 언제 국민 앞에 떳떳해질 것인가. 야당이든 여당이든, 장외의 확성기보다 장내의 문장으로, 모욕의 돌멩이보다 사실의 문서로 싸울 때—그때 비로소 우리는 1966년의 국회를 뒤로 넘길 수 있다. 오늘의 적반하장을 멈추고 스스로 제도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 그 첫걸음이야말로 반세기 만에 가능한 최소한의 사과이자 유일한 갱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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